종교적 다양성에 관하여
종교적 원판은 불변법칙인가, 가변법칙인가?
서명원
가톨릭 예수회 신부/전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필자가 자주 들을 수 있으며 늘 흥미롭게 다가오는 한국어 표현 중 하나는 ‘원판불변법칙’이다. 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누군가의 굳어 있고 좁은 사고방식과 거기에 따른 행동과 행위를 비판할 때, “이 놈이야말로, 죽어 봤자 추호도 좋아지지 못하겠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정(斷定)의 말이기 때문이다. 이 졸고에서는 종교적 기본 사고방식, 즉 자기의 고유한 종교적 원판(原版, one’s original religious formatting)의 불변성과 가변성의 여부에 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현대의 종교학의 창립자인 막스 뮐러(Max Müller, 1832-1900)의 명언에 따르면, “[종교를] 하나만 알면 그 하나도 모른다.” 1) 이 말씀이 일깨워주려고 하는 이치대로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자기의 종교적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려고 한다면, 일단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을 최소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다양성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는 인생에 관한 기본적 자세를 취해야만 하겠다. 종교란 알게 모르게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들에 두루두루 침투하기 때문에, 풍요롭고 알차게 사람답게 살려면, 자신의 고유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능한 한 심도 있게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반면에 누군가의 종교적 원판이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라서 굳어버린 성질의 것이라면, 삶의 체험의 폭이 좁아지는 만큼 이웃 종교들과 좋은 열매를 맺는 교류를 할 줄 모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원판이 심각한 종교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알력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생길 수도 있다.
   종교의 개념을 단순히 설정하자면, “마루(宗)에 관한 가르침(敎)”이다. ‘마루’란 널빤지로 만든 집의 바닥도, 등성이를 이룬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해석해 볼 때에, 살아가는 데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거나 제일 높은 것으로 생각해서, 최고로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이치를 의미하는 낱말로 아주 폭넓게 정의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종교란 존재의 이유를 찾아내는 데나,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가르침이다. 조금 의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돈이 누군가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라면, 돈이 바로 그 사람 삶의 ‘마루’가 된다.
   동서남북에 걸쳐 대소를 가리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 지구촌에 현존하는 종교적 전통이 4,3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만큼 많은 전통들이 ‘마루’에 관해서 제공해 주는 가르침이 많다. 응당 각각 ‘마루’를 명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이름들, 즉 공(空), 도(道), 범(梵), 불(佛), 신(神), 리(理)(天), 알라(Allah), 중도(中道), 하나님, 하느님, 하늘님, 허(虛) 등 무어라고 하든지 간에 그 이름들이 부지기수다. 유대교에서는 궁극적인 존재의 초월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낱말 중 하나인 YHWH를 외우는 것을 신을 모독하는 죄로 다할 수 있는 데까지 엄격하게 단죄한다. 따라서 그러한 죄를 안 짓기 위하여, 그 이름을 “나의 주님(아도나이, Adonai)”으로 읽는다거나, YHWH를 이루는 네 개 자음의 이름만을 하나씩 명확하게 구별하면서 외운다.
   이 졸고에서는 누군가의 종교적 원판이 본래 굳어 있어서 별로 개방적이지 못할지라도, 알맞은 조건 하에서,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러한 완고한 원판이 180도 돌아서서 활짝 열린 방향으로 한없이 진화할 수 있다는 희망찬 가능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환언하자면 종교적 사고방식이란 반드시 원판불변법칙의 지배 아래 있어야만 되는 성질의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질적으로 충분한 교육을 통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에 큰 힘이 되는 무한한 가변성을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종교적 다양성이란 주제가 방대한 것만큼 지나치게 추상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글의 1 부에서는 제한되어 있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필자의 종교적 체험에 관하여, 2부에서는 요즘 지구촌에서 종교 간의 알력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갈등에 대해서, 3부에서는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에 관한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종교적 우물 안의 개구리(坐井觀天)
필자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으로서 1953년 말에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한반도에서 6·25의 골육상쟁이 끝났던 바로 그 해와 똑같은 때다. 종교는 소위 모태신앙으로서 그 당시의 대다수 불어권 캐나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였다. 그런데 우물 안의 개구리 신자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시 어릴 때부터 가정 교육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인자(仁慈)한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님으로써 천주교 말고는 구원의 길이 별로 없다고 배웠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그 사실을 굳건히 믿었다. 조금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서 생각조차 못 했다. 그 당시에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들 중에 성당에 꾸준히 안 다니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기가 어려웠으며, 만일 안 다녔을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탄을 면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한편 고향인 몬트리올에 양친의 댁이 자리잡은 동네에는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 말고도 영국계 캐나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다수가 성공회(Anglican Church)에 속한 신도들이었다. 그들 중에 친한 친구가 된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무리 좋고 고귀한 인간일지언정, 구원을 받으려면 조만간 당연히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만 할 거라고 아주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설득해서 개종시키려고 하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냥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끔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길가에서 마주친 모르는 영어권 캐나다 사람들과 말다툼만이 아니라 신체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싸움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살만하고 충분히 조화로운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퀘벡주에 사는 원주민 11여 개 부족의 존재와 2) 그들의 기가 막힐 정도로 다양한 언어, 문화, 그리고 종교에 관해 필자의 인식 수준은 지극히 낮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한참 후에야, 어렸을 적에 배운 것과는 달리 그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수준이 높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으며, 우리 현대문명과 달리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사실에 제 눈이 뜨였다.
   또한 그 당시에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유대교와 이슬람이 차지하는 비중에 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유대인들에 관한 지식은 “돈을 너무 좋아하니까 흥정하는데 아무도 못 따라갈 정도로 뛰어나서 돈을 아주 잘 번다.”는 것과 비슷한 고정관념이었다. 중학교 지리 수업 시간에 이슬람교에 관하여 배운 바로는 “마호메트라는 종교광이 가짜 계시를 얻고 회교라는 새로운 종교 운동을 시작했다.”는 정도일 뿐이었다. 애니미즘이나, 무속이나, 인도나 중국의 종교들에 관한 교육이야말로 하나도 없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받은 종교 교육의 폭이 비좁은 것만큼 수준이 낮았다.
   사실상 퀘벡주와 캐나다에서 사는 유대인들은 3)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는 유대인들처럼 소수이면서도 오래전부터 무시해서는 안 되는 강한 정치경제적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슬람의 신봉자들은 소수이지만 4) 2017년 1월 29일에 퀘벡시에 있는 대 모스크에서 터졌던 테러 사건 후부터, 무슬림의 존재나 그들이 전 세계의 이슬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과소평가하기가 어려워졌다.
   필자가 사춘기를 보내는 동안에 국내외에서 일련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베트남 전쟁, 히피 운동, 바티칸 제2 공의회, 프랑스의 1968년 5월 학생혁명[May 68 Student Revolution], 퀘벡주의 소위 고요한 혁명[The Quiet Revolution]과 독립운동의 시작 등), 신기하게도 어렸을 때 형성된 필자의 단순한 종교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것으로 미루어서 어린 시절에 받은 교육으로 말미암아 생긴 종교적 사고방식의 복원력(resilience)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19살이 되었을 때, 즉 1973년 의대에 다니기 위해서 프랑스에 유학갔다. 그러다가 1979년에 예수회(Jesuit Order)라는 가톨릭 남자 수도회의 프랑스 관구(管區)에 입회(入會)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캐나다 퀘벡주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가 많은 반면에 개신교 신자는 소수였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서 로제 수사님(Roger Schu¨ tz, 1915–2005)이 창립하신 떼제(Taizé) 공동체가 고차원적 교회 일치 운동을 활발하게 하며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그 공동체와 영향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캐나다와 달리 각각 사회당과 공산당 소속인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중에는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가 상당히 많았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지금에 비하면 조용하게 사는 무슬림이 더러 있었다. 2020년의 통계로 미루어서 프랑스 인구의 10%, 즉 670만 명 정도가 이슬람교도임을 알 수 있고, 그들이 종교생활을 하는 모스크 수는 대소 시설을 다 포함해서 2,500여 군데가 된다. 그런데 그 무슬림들은 결코 이구동성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경향도, 진보적인 경향도, 그리고 그 양극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경향들도 아주 다양하게 보인다. 요즘 주지하다시피 프랑스의 국가 헌법이 백 년 넘게 주창해 온 세속적 문화(secular culture)와 이슬람교의 보수적인 세력들이 여러 방향으로(때론 폭력적으로까지) 복잡하게 부딪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프랑스에서 오래전부터 이슬람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5)
   프랑스에 사는 유대인들은 무슬림에 비하여 소수이지만, 6)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모든 차원에서 끼치고 있는 영향력이 상당히 크다. 그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아주 다양한 종파들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 가장 진보적인 종파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아주 역동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필자가 프랑스에서 예수회에 입회한 후 수련기를 마치고 연학 과정을 밟고 있던 1983년에 예수회 한국 관구의 책임 담당자가, 예수회 프랑스 관구의 관구장에게 “우리는 일손이 많이 모자란다. 젊은 사람 몇 명을 한국으로 좀 파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편지로 보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필자가 한국으로 선교사로서 파견되었다. 서울에 와서 첫 3년 동안 연세대학교의 한국어학당에서 심혈을 기울이면서 한국말을 공부했다. 그동안에 배달민족의 종교계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1988년에 충분한 실습을 포함하여 종교 관련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부의 맥을 다할 수 있는 데까지 폭넓게 잡았다. 한국은 북미와 서유럽과 달리 글자 그대로 다종교 문화권(multi-faith cultural area)이다.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따르면,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인 무속, 불교, 유교, 그리고 때때로 그리스도교가 하나씩 차례대로 반도의 역사적 무대에 올라와서 출연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요소들이, 지각을 이루는 수많은 지질학적 계층이 기나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서서히 겹쳐져 왔듯이, 사람의 무의식 속에 쌓이고 쌓여서 역동적이며 복합적으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사고방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누군가가 필자에게 한반도의 종교사를 바라볼때에 유념할 만한 특징 하나만을 알려 달라고 청한다면, 한국인들은 자주 서로 이견이 없는 듯이 ‘우리’라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볼 때에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다양성을 보여준다고 대답하겠다.
   소우주 같은 한국 종교계의 범위가 하도 방대하여서, 미로 안에 들어가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느낌이 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지나친 욕심에 반드시 망한다.”는 과욕필망(過慾必亡)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은 동시에, 선배로부터 “우물을 파도 하나를 파라!”는 말씀을 듣고 나서 정신을 더욱더 차렸다. 그래서 비교적 가슴에 더 깊이 와 닿는 한국 불교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어서 1995년에 한국의 20세기 불교를 잘 대표하는 성철(性徹, 1912-1993)에 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1996년 (사)한국선도회(韓國禪道會)에 가입해서 오늘까지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한결같이 해 왔다. 2004년 봄에 파리 Denis Diderot 대학의 한국문학과에 제출한 박사 논문에 대한 심사를 받고,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한지 몇 개월 후에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필자는 무슨 인연 때문에 다종교의 문화권인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여전히 전혀 모른다.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 살면서 서서히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의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원판에, 지대한 흔들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문화적, 종교적 차원에서 깊고 깊은 정체성 위기에 빠져버렸다. 바닥을 치고 그 위기의 늪에서 서서히 헤어나서, 천신만고 끝에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내는 데에 20년이나 걸렸다. 이어서 그 결과를 보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수많은 단계들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하기보다는, 그 과정 끝에 지금 인류의 종교사가 보여주는 기가 막힌 종교적 다양성에 관한, 필자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거두절미해서 선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구촌에서 종교 간 알력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갈등
인간의 종교 전통이 다양한 것만큼 세계 도처에서 종교적 알력 관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갈등이 무척 많다. 요즘 국제 뉴스를 잠시만 들어도 그러한 문제들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언급할 만한 지역이나 국가로서, 아프리카 혼(horn)의 에티오피아, 인도 북쪽의 캐시미어, 중국의 신강성(新疆省),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쉽게 예로 들 수 있다. 중동의 경우, 레바논, 북시나이, 시리아, 예멘,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외에도, 비교적 모든 차원에서 이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카타르(Qatar)를 2017년 5월부터 철저하게 봉쇄해 온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연합국, 이집트 등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예로 든 갈등 사례들이 모두 순수하게 종교 간 알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사례들이 분명하게 알려 주듯이 종교 전통들이 제기하는 다양하고 고상한 이상(理想)들은 인간계를 일탈해서 공중에 떠있는 양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쉬우면서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은, 오히려 그 전통들을 각각 대표하는 궁극적 이치들과 종교적 이상들이 높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정착하는 과정 중에 인간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왜곡되거나 때로 심지어 배반당해서 완전한 추락으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이다.
   모든 종파를 막론하고 현대 한국 인구의 27% 정도가 신봉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예를 들자. 그리스도교의 본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상징인 십자가의 진정(眞正)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어떤 폭력이든지 철저하게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적으로 마음먹어야 할뿐더러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 폭력을 스스로 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고 의연하게 여기고, 이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적 관점에서 해명할 때, 나자렛 예수의 소위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계를 자꾸만 생지옥으로 만드는 폭력의 끊임없는 악순환을 부수어 버리는 힘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가 자신이 당하는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정신이나 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행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이용, 남용, 악용, 오용해서, 예나 지금이나 전쟁까지 일으켜서 인간계를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경우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어느 종교든지 이렇듯이 자가당착에 쉽게 빠져버릴 수 있다. 예컨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Dalai Lama) 덕택으로 흔히 순수한 평화주의로 알려져 있는 불교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불교의 높은 이상을 팔아먹어서 사바세계가 피바다가 된 경우들을 더러 발견 할 수 있다. 국제연합회의 인권위원회에서 전형적인 대량 학살로 평가 받은 미얀마의 로힝야족 사태만 봐도,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창립자로 인정받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기원전 563?~ 483?)가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은 큰 효과는 없었지만,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서 전 세계의 수많은 불자들이 불교 국가인 미얀마의 최고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에게 그 학살을 즉시 중지시켜서, 피해자들을 무조건 도와주고 범죄자들을 처벌해야만 한다고 거듭 간절히 청한 바 있다.
   대저 종교와 정치가 복잡하게 유착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 간 알력은 사회적, 경제적, 국제관계 차원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인간 삶의 모든 차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그 영향으로 인해서 내전이나 전쟁까지 일어났을 때에는 뉴스의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보고 듣는 것을 참기 어렵고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닌가’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서나,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일으키는 기후 변화를 통하여 누구나 재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사는 곳은 좋든 싫든 역시 지구촌이란 큰 마을이다. 따라서 타조인양 종교적 다양성과 관련된 우리 지구의 복잡한 현황을 외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용감하게 직시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건전한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대응일 것이다.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에 관한 올바른 자세
아마도 종교적 다양성에 관한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을 “나의 혹은 우리의 종교가 아닌 종교(not my or our religion)”나 혹은 ‘다른 종교(other religions)’로 삼기보다는, 이웃 종교(neighboring religions)로 삼고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첫걸음이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물론 그 이웃 종교들에 관한 최소한의 아량(雅量)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진정한 아량을 보이는 것이 겉으로 쉬운 것 같이 보이면서도, 사실상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종교적 우열을 가리려고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인도를 해방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의 경우, 이웃 종교들에 있어서 한량없는 아량을 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독한 극기고행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은 무슬림의 정치적 세력을 대표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가 통일된 인도에서 힌두인들과 같이 살기를 꺼렸기 때문에, 간디가 꿈을 꾸던 대인도가 둘로 갈라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핵무기를 휘두르면서 서로 적대시하는 파키스탄과 인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타깝지만 종교적 다양성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종교인들의 원판이 충분히 너그럽지 못하다.
   흔히 “우리나라는 다르다. 그러한 문제가 없다. 우리는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한반도에서는 종교 간 알력으로 인해서 큰 갈등이 생기거나 내전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내포하는 이상주의적인 역사관은 어느 정도까지만 현실을 반영해 줄 뿐이다. 실제로 한반도의 역사를 조금만 더 심도 있게 살펴보면, 싫겠지만 이와 같은 역사관을 반박할 수 있는 수많은 사건과 경우가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다.
   뻔한 예로서 조선시대 내내 철저하게 실시한 억불숭유 정책이나, 19세기 가톨릭에 대한 끔찍한 일련의 박해를 들 수 있다. 또한 북한의 주체 사상과 그에 해당하는 극단적 공산주의가, 어떤 면에서 지극히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종교처럼 기능(機能)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면, 해방 후에 터진 6·25의 골육상쟁이 종교와 전혀 무관한 사건이었다고는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6·25이후의 예로서 소위 왜색불교를 나라에서 정화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명분으로, 감리교 소속 이승만(1875-1965)의 정권 하에서 벌어지기 시작하여 60년대 후반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대처승들과 비구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도 들 수 있다.
   현대 한국에 있어서는, 장로교 소망교회 소속인 이명박 대통령과 대한불교조계종 사이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 관련 정부 지원 예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건을 기억하기만 해도, 개신교와 불교와의 관계를 늘 알력이 없는, 아량이 가득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예외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한국 개신교의 다양한 종파들과 가톨릭이 서유럽에서처럼 교회 일치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화가 약하기 때문에, 개신교 신도와 가톨릭 신자가 서로 사랑해도 결혼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결국은 크게 볼 때에 둘 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둘 중 한 사람은 자신의 종파를 포기하고 상대편의 종파로 개종해야만 하는 경우들이 많다. 만일 불교 신도가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와 결혼하려고 한다면 더욱더 힘들어 질 수 있다.
   필자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가르치면서 때때로 학과의 대학원에 입학 시험을 치르러 오신 목사님들을 위해서 면접을 진행해야 했다. 그들에게 종교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몇 분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설교할 때마다 스스로 믿지도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거짓말 속에서 사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다. 더 이상 저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 다양한 종교들에 열려 있지 못하는 개신교 신학 말고도, 우리나라의 종교에 관해서도 배우고 싶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런 저의 입장을 못마땅해 하기 때문에 제가 이 면접 시험을 보러 여기에 온 것을 알면, 즉시 저를 내보낼 것이다.”
   그 목사님들이 마음속으로 깊이 느낀 바 대로, 어느 종교든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이 되지 않는 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서서히 화석화되며, 맨 마지막에 가서 자기 타당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다. 소위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이 세 가지 요소인 전통, 맥락, 해석으로 그 끊임없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즉 어느 종교의 신도들이라도 자기가 의지하고 신봉하는 종교적 전통의 경전들(traditional texts or scriptures)을, 주어진 새로운 역사적 맥락(context) 안에서 알맞게 해석(interpretation)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어느 종교든지 자기의 전통(tradition)에 충실하면서도 변형(transformation)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기는 용이하지만, 이 과정은 사실상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사고를 동시에 동원하는 변증법으로서, 어떻게 자기 종교의 최고 이상(마루)을 실제적으로 현실 안에서 구현할 것인지에 관하여, 끊임없는 고민을 요구하는 줄타기와 같다. 우리 지구촌의 현황에서 어느 종교나 생존권을 유지하려면 이웃 종교들과 최소한의 교류를 할 줄을 알아야 한다. 다종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국내외에서 모든 종교들이 예외 없이 상당한 폐쇄성과 배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거나 들릴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예로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그리고 불교의 순서대로 각각을 잘 대표해 주는 인용문들을 보자.

“우리는 안다. 어느 날 모든 세계의 민족들이 영원한 평화의 축제를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평화를 이룰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같이 기도할 것임을. 그리고 세계적인 형제애(형제의 연대), 세계의 통일과 인류 통일은 거기서 이뤄질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그리고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벨푸[Balfour, 1848~1930] 선언 100주년.” <The Messenger: The Magazine of the Liberal Israelite Union of France>, 2017년 12월호 특집 기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 하느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6

“알라 밖에는 신이 없다. 마호메트 만이 유일한 알라의 예언자이다
(La ilaha illa Allah Muhammed asul Allah).”
하루에 다섯 번 하는 기도를 시작할 때 전 세계 모든 무슬림들이 외우는 내용

“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오직 나만이 높도다. 세계가 모두 괴로움이므로, 내가 장차 편안하게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동국역경원에서 번역한 「보살강신품(菩薩降身品)」 중에서

   이 모든 인용문의 공통점은 각각 자기 종교의 ‘마루’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극도로 절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여러 원인 중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을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그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삶에 의미와 존재 이유를 부여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종교가, 상대적인 것으로 변해서, 그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구촌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데 지나치게 절대화된 ‘마루’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그들 사이에서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거나 부수어 버리는 위험한 경쟁 및 대립관계가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경시할 수 없다.
   한편 인류의 종교사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이렇듯이 절대화된 종교들의 모든 ‘마루’들은 예외 없이 전부 다 상대적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종교학자의 소위 객관적인 입장과 종교인의 소위 주관적인 입장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객관성과 주관성이 대립하는 문제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인문학의 주관성과 종교 체험의 객관성을 각각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다가는 “종교인의 체험이야말로, 객관성이 완전히 결여된 순수한 주관주의다.”라는 엉뚱한 결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종교인의 고유한 체험이 가지는 상대성과 절대성을, 혹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살릴 수 있을까?
   대저 여러 종교가 으뜸으로 삼는 원칙이나 궁극적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종교적 다원주의(多元主義)라고 하면, 종교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불자들에게 거부반응을 강하게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종교적 다원주의란 한덩어리로 된 개념(monolithic concept)이 아님을 모른다. 사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다원적 다원주의, 포괄적 다원주의, 일원적 다원주의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셋을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생활을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원적 다원주의에 따르면 인류의 종교의 수가 많고 다양한 것만큼 산들도 많다. 그런데 그 산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 산들을 올라가고 있는 등산객들이 서로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인류의 종교들이 너무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아내서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가 영원토록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환언하자면 종교 간의 유사성을 못 보고 극단적으로 차이성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포괄적 다원주의에 따르면, 산은 하나밖에 없지만 인류의 종교들은 각각 그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다양하고 고유한 오솔길들과 같다. 그런데 산의 꼭대기는 다름아닌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의 ‘마루’와 같다. 결과적으로 아량이 있어서 이웃 종교들을 어느 정도까지만 인정해주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포괄’하는 즉 자기 수하에 집어넣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我執)을 일으키는 “우리 종교는 최고다.” 라는 아상(我相)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원적 다원주의는 인류의 종교들이 각각 그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다양한 오솔길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꼭대기에 아무 ‘마루’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그 꼭대기는 아무도, 아무 종교도 영원토록 언어화하거나 차지할 수 없는 오묘한 언어도단의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오솔길들 중 어떤 것도 산의 마루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오솔길들이 산꼭대기를 향해 있는 한, 그 산꼭대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산길과 산꼭대기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역설적으로나마 고수하며 강조하는 입장이다.
   오로지 이 입장만이 종교적 체험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양극단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그 체험의 주관성과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모두 살려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이 올라가는 오솔길은 수많은 산길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자신이 충실히 따라가는 오솔길로서는 둘도 없는 고유한 산길로 삼는 것이다. 다른 비유로 설명하자면, 자신의 모국어는 다른 언어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유하면서도, 관심만 있으면 배울 수도 있는 인류의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다.
   오로지 일원적 다원주의만이 진리에 관한 대화적 접근 방식, 즉 더불어 함께 오묘한 ‘마루’를 향해서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내려고 하는 종교적 생활 방식을 허락한다. 자신이 이웃 종교가 다니는 산길에 대해 얼마든지 관심을 가질 수 있듯이, 이웃 종교 역시 자신이 다니는 산길에 관한 관심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모든 오솔길들이 언어화 할 수 없는 꼭대기를 향해 있기 때문에, 그 산길들이 “다 완전히 다르다”라고 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오솔길들이 전부 다 둘도 없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이 산길이나 저 산길이나 다 똑같다”는 주장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이웃 종교와의 대화”란 19세기에 막스 뮐러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고대에서 인도를 무력으로 통일시키고 난 다음에 아쇼카 대왕(Aśoka, 기원전 304 ~ 232)이 백성을 위해서 나라 도처에 세운 돌기둥이나 큰 바위에 새기게 한 칙령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칙령에서 아쇼카는 백성들에게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아쇼카는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신조들이 세부적으로는 다르다 하더라도 중요한 점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이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자 일치점들에 쏠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쇼카는 사람들이 다른 집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많은 것을 배우고 박식하게 되며, 만족스런 방식으로 자신의 종교 체계를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신조들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면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될 것이며, 다양한 신조들 속에서 일치의 느낌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



   현대 종교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칙령의 내용으로 미루어서 일원적 다원주의자로 여길 수 있는 아쇼카 대왕은, 백성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종교 간 대화를 통해서 종교 간 알력과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노력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깊이 움츠리는 개구리가 멀리 뛴다
필자는 한참 동안 종교적 시야가 좁은 사람, 즉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인생의 여정이 허락해 준 일련의 체험들을 통해서, 인류의 종교적 다양성을 서서히 발견하고 폭넓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릇이 좀 더 넓고 깊은 종교인이 될 수 있었다. 비유컨대 한참 동안 우물의 바닥에 앉아 있던 개구리가 어느덧 원천적(源泉的)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인류 종교의 다양성에 눈이 뜨여서 마음이 활짝 열린 것만큼, 그전까지는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가 “최고다!”라는 입장을 꽉 취하느라고 소모되던 상당한 힘이 개방되어서 자유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듯이 이웃 종교에 관해 큰 관심을 가지는 필자에게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냐?” 물어보거나, 필자를 “신부!”라고 부르기보다는 “스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필자는 아쇼카 대왕이 돌에 새긴 칙령을 통해서 고대 인도 백성에게 가르쳐 준 이웃 종교에 대한 정신을 이어 받은 경계인(frontier pers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혼합주의에 빠진 종교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종교 간대화란 자신의 종교적 정조를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엄밀하게 주창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정한 곳에 박은 종교적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있다. 자기의 모국어를 제대로 알아야 외국어를 올바르게 배울 수 있듯이, 자기의 본래 종교를 웬만큼 알아야 이웃 종교를 건전하게 사귈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불교를 전공한 필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가톨릭 사제다. 뿐만 아니라 불교 말고도 유대교, 이슬람교, 도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들을 사귐으로써 자기 종교적 정체성을 더욱더 확고히하는 “철저한 예수쟁이”가 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더욱더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다. 필자보다 더 열심히 사는 이웃 종교의 신봉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스스로에게 큰 도전이 되어서 기쁘다.
목차
종교적 다양성에 관하여
한국 교육에서 ‘다양화’의 이중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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