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악은 벗들의 음악이다. 2중주부터 9중주까지 가깝게 둘러앉아 또아리를 이룬 연주자들은 숨소리와 눈빛을 은밀히 교환하며 서로에게 집중한다. 다양한 성부가 동시에 어울리는 음악적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연주자들 사이 친밀한 우정이 자연스레 싹트곤 한다. 함께 연주하는 멤버와 사사로이 다퉜더라도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합을 맞추게 되니 일상의 앙금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악기들이 주고받는 실내악의 친밀한 대화는 갈등을 무력화시키는 환대의 정신을 담고 있다. 작곡가들도 실내악을 작곡 할 땐 관객을 사로잡을 연주효과 만큼이나 연주자들의 음악적 우정을 섬세히 고려한다. 서로의 교감을 존중하는 합주의 즐거움은 실내악의 오래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독주에 비해, 앙상블을 이루는 협업은 소통과 이해가 최우선이다. 몇 해 전 〈슈만의 피아노 4중주 내림 마장조 작품 47〉과 〈브람스의 피아노 5중주 바단조 작품 34〉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현악 4중주단과 리허설을 함께 했었다. 홀로 연습하던 독수공방으로부터 해방되어 뛸 듯이 기뻤다. 반쪽짜리 대본에 의지해왔던 배우 마냥, 청각적 상상으로나 떠올리던 상대편 목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있어 설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명은 오래 전부터 현악4중주단을 결성해 전문적인 활동을 펼쳐왔었다. 피아노와 현악기군의 이질적인 울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리허설 내내 심신의 귀를 쫑긋 세웠다.
리허설이 거듭될수록, 피아니스트인 나는 현악주자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교감할 수 있었다. 바이올린 주자는 실내악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주회가 무대 위에서 홀로 펼치는 고독한 ‘모노드라마’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대규모 인원들을 등장시키는 화려하고 장대한 ‘블록버스터’라면, 실내악은 주연 배우 네다섯이 펼치는 고도의 ‘심리극’이라는 것이다.
실내악에서는 주·조연의 계급 구별이 없다. 모든 성원은 갈등의 직접적인 당사자다. 익명성의 거대한 음향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없다. 내 악기의 개성적인 음색은 다른 주자의 목소리와 확연히 분별되어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이 몰입하게 되는 장르는 순차적 동선으로 연결되곤 한다. 처음엔 강력한 음향을 내뿜는 교향악에 압도되고, 이후 솔리스트와 대비를 이루는 협주곡에 경도되었다가, 다시 개별악기의 매력에 탐닉하는 독주곡으로 이어져, 결국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실내악으로 귀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