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차이 그리고 차별
박경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2018년 여름에 제주도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방문한 500여명의 예멘 사람들 때문이죠.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도착한 후에 먹고 자는 것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한국 사회는 매우 시끄러워졌습니다. “가짜 난민들이다, 테러리스트들이 몰려왔다, 한국 여성들을 겁탈 할 것이다, 그냥 두면 한국이 이슬람화될 것이다……”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난민 허가를 반대하는 청원이 올라와서 순식간에 70만 명이 넘게 서명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천일야화’의 땅이고 풍부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예멘은 내전으로 인해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조금만 검색을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도,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온 가짜 난민이라는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이들이 한국에 와서 저질렀다는 나쁜 짓들도 역시 검색을 해보면 모두 가짜 뉴스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을 거부하는 이유는 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싫어서’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좀 더 따져보자면, 그들이 무슬림이고 테러리스트라서 싫다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일부 극우 기독교 쪽의 시각인 것 같은데, 그들이 근거로 얘기하는 것 중에는 무슬림 때문에 유럽에 테러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테러는 외국인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민자 2세들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국민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극심한 차별과 불평등은 오히려 그들의 무슬림 정체성을 강화해왔습니다.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업을 가질 수도 없고, 경찰의 검문과 체포가 반복되고, 미디어가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묘사한다면 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쌓일 수 있겠지요. 테러를 합리화하는 게 아닙니다. 무슬림이어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이라고 차별한 사회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예멘 난민들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슬림들이 들어오면 여성 억압과 성폭력이 폭증할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물론 증거에 기초한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가부장적 전통을 가진 이슬람 국가가 많기 때문에 그런 염려를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논리적인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극우 세력과 함께 연대하게된 모양새는 어색해 보였고, 이방인을 적으로 삼는 공격적 민족주의를 공통분모로 삼으면 페미니즘과 가부장적 극우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한편 난민을 반대하는 대열에는 일부 청년들도 합류했습니다. 청년들은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가져갈 것이라는 우려와 세금을 축낼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겨우 500여 명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든다고 쉽게 나무라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들의 진짜 두려움은 이런 식으로 문을 열다가는 앞으로 엄청난 숫자가 밀려들어 올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실업에 찌들고 취업, 결혼, 출산 등과 같은 여러 가지를 포기한 ‘N포세대’가 하는 말이라서 매우 가슴이 아팠지만,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기초해서 하는 주장을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라는 극우파 백인이 다문화주의에 반대한다면서 77명을 학살하는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선진국이라는 북구의 평화로운 나라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사에서 당시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큰 민주주의와 개방성, 그리고 인류애입니다. 단순한 대응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난민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는 이미 다양해진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을 닫으면 우리끼리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믿음에 불과합니다. 다양성이라는 주어진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차별과 폐쇄가 아니라 평등과 개방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혐오와 배척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높은 수준의 인권입니다
우리 안의 다양성
최근의 다문화 열풍이 불기 전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단일 민족의 신화를 믿어왔습니다. 수많은 외침(外侵)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왔으며, 이것을 우리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2019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한국 땅에 사는 외국인의 숫자는 252만 명을 넘어서서 총인구의 5%에 이르고 있습니다. 비록 코로나19 때문에 최근 몇 달 동안 조금 줄기는 했지만, 인구학자들은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살아갈 외국인들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예측합니다. 내국인 총인구가 줄기 시작한 것을 고려해보면 외국인 비율은 더욱 높아져서 말 그대로 이민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에 아직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 준비가 잘 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주와 관련된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장애인도 있고 비장애인도 있습니다.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지만, 태어날 때의 성별이 아닌 다른 성별을 스스로 선택하는 성전환자도 있습니다.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요. 우습지만 한때 B형 남자의 성격이 이렇다 저렇다는 말이있었던 것처럼 혈액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본다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DNA가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도 지문이 다르다고 하니 정말로 세상은 다양한 것이고, 우리 모두는 다양성의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회는 원래부터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획일적인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더 나아가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남과 달라야 하고 더 나아가 ‘튀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단일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동단결이나 일사불란 같은 단일함을 강조하면서 다양성을 애써 외면했던 시절도 있었고, 심지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집단적인 단일함이 도움이 되는 시절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닌데도 말이죠. 우리 안에는 여전히 다름/차이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고, 그걸 없애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순수함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대와 소수자 차별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 배워왔고, 약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줘야 한다고 공익광고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엄연히 차별이 존재합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 여성의 임금은 남성 평균 임금의 약 67%에 불과해서(2018년 기준) OECD 국가들 중에서 꼴찌입니다. 역대 국회 중에서 최고의 여성 의원 비율을 기록했다는 이번 21대 국회의 수치도 19%여서, OECD 평균인 29%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2020년 기준 장애인의 고용률은 약 35%여서, 전체 고용률(61%)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논란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시대에 국민들은 긴급재난지원금의 혜택을 받았지만, 똑같이 세금을 내고 의료보험료도 납부하면서 열심히 일해 온 이주노동자들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합법적인 체류 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차치하더라도 합법적인 이주노동자는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여러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의 ‘증거’들이 끝없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저런 차별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전근대적인 중세시대에 사는 게 아니라 이성과 계몽의 시대인 근대에, 아니 심지어 탈근대를 말하는 21세기에 살고 있는데 왜 아직 소외된 사람들이 있을까요? 과학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인권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증대되고 있는데, 왜 지금까지 차별받는 사람들이 존재할까요?
   한국이건 서양이건 간에 전근대 사회는 신분에 따른 속박과 그에 따른 차별 대우가 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왕족, 양반, 귀족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을 보장해준 것에 비해서 상민(常民), 평민, 농노, 상인들에게는 매우 제한된 권리만 주어졌습니다. 특히 최하위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노비, 노예, 백정 등)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피할 길이 없었으며, 공동체 성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권리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의 신분이 인간이냐 아니냐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반면에 근대 사회는 봉건적인 질서가 갖는 신분적 속박을 넘어서 계약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탄생시켰습니다.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신분에 기초한 차별을 철폐한 근대적 질서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신분제도가 사라졌으므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차별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게 변해가지 않았습니다. 각종 새로운 기준에 기초한 다양한 차별들이 생겼습니다. 물론 현재의 차별 수준이 과거의 차별보다 더 심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목숨조차 쉽게 빼앗던 신분제 시절의 차별을 극복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소외, 편견, 차별은 어김없이 남아있으며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차별 없는 평등을 지향해온 근대 사회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이것은 근대가 갖는 특징과 관계가 있습니다.
   근대의 차별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을 가지며, 어떤 의미에서 한층 더 정교하고 교묘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속박에 묶여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재벌 자녀로 태어난 사람과 기초수급대상자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똑같은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공정하게 경쟁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오바마 신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과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동등하게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올해 자산 총액이 2조 이상인 147개 기업의 임원 중에서 여성의 비율이 4.5%인 상황인데도, 여성도 노력만 하면 다 된다고 말하는 것은 선의의 거짓말이거나 그저 사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는 애당초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무능력하고 게을러서 실패했다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일부 사람들이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회의 평등’이라는 신화는 구조적 모순을 덮어주며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둘째, 어차피 근대와 자본주의가 한 울타리 안에서 성장해 왔으므로 근대적 가치는 곧 자본주의적 가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가치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차별 대상이 됩니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상품 가치, 생산성 제일주의, 시장원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노인, 장애인, 저학력자 등과 같이 생산성에 도움이 안 되는(또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소외의 대상이 됩니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그것에 필요한 교육을 못 마쳤다는 의미에서 동등한 성원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기존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규정된 일탈 집단들도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범죄자나 마약 중독자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배제에 대한 동의가 이뤄집니다. 성소수자처럼 주류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소외의 대상이 되지만, 조금이라도 상품가치가 있다면 언제라도 활용됩니다. 즉 성소수자의 구매력이 확인되기만 하면, 그리고 그와 연관된 상품이 팔릴 수 있다면 소위 ‘핑크 자본주의’는 돈을 벌기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그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척도 근대의 산물입니다. 근대 이전에도 지역에 기반한 집단 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양을 기준으로 보면) 국경이 애매하고 다른 나라 사람을 왕으로 ‘모셔오는’ 실정이었으므로 근대의 민족에 해당하는 개념은 없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생산은 역시 근대에 시작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여 발전해왔습니다.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상품을 안정적으로 판매하고 그에 필요한 원료를 위험 없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타국과의 경쟁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 단결과 민족 간의 대결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 더 많이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고대에 있다가 사라졌던 노예제를 재탄생시켰고, 이것은 흑인을 밑바닥에 두고 백인을 정점에 놓는 인종주의를 낳았습니다. 사실 흑인을 인간으로 봤다면 노예로 부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은 계몽과 이성을 갖춘 근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동력 부족을 흑인 노예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백인들은 흑인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습니다. 인간이 아니므로 가축과 비슷한 노예로 부려도 된다는, 실로 어이없는 결론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질서는 인종과 민족 갈등의 중요한 원인일 수 있겠습니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 차별
세상에서 화교가 뿌리를 못 내린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나라가 많이 있지만, 어쨌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한국 사람이 독하고 모질다는 것의 증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한국 사람은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식의 표현은 사회 현상의 원인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어서 더 이상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한국 사람이 유전적으로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다는 식인데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사회과학적인, 역사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좁은 땅에서 지리적 이동이 거의 없이 정착해서 농경을 했기 때문에 외지인/타자에 대해 배타적이 되었다고 결론을 지어버리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종의 지리결정론에 빠질 수도 있고, 농경사회의 전통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농경 이후의 변화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특징의 원인은 한국이 걸어온 근대화 과정에서 찾는 것이 더 타당하겠습니다. 한국의 근대는 식민지 경험과 분단 현실, 그리고 이어지는 권위주의 정권으로 집약되며 이것이 특정 집단에 대한 소외와 차별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연줄 또는 연고주의부터 시작해보죠. 흔히 한국 사회의 특징을 얘기할 때 혈연, 학연, 지연 등의 각종 연고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잘 알거나 자신과 비슷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폐쇄적 응집성의 결정판은 가족 이기주의입니다. 물론 전통 사회에도 가족은 유대를 느끼고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단위였지만,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역시 믿을 것은 ‘핏줄’밖에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사회 구조가 해체된 상황에서 합리성에 기초한 근대적 규범이 만들어져야 하는 시기였지만, 법과 제도에 의해 운영되어야 할 구조가 형성되지 못한 채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지배 구조가 탄생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양민 학살이나 빨갱이 사냥으로 생명을 위협했고, 권력자들은 불법/편법으로 자신들만의 공화국을 만들어 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가족을 비롯한 각종 연고 집단은 이를 위한 가장 손쉽고도 빠른 통로가 되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한 살만 많아도 형/누나/언니/오빠와 같은 호칭을 사용합니다. 제가 어릴 때 재수나 삼수를 한 동기와 서로 반말을 하던 시절은 옛날 얘기가 된 것 같습니다. 서구와 비교해볼 때 한국은 서열과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나치 시절 독일의 권위주의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권위주의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라면서 다양한 사회적 제약과 억압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자연스러운 본능이 억압되고 왜곡되면서 좌절을 겪게 되는데, 이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나 권력기관에는 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표적을 찾아서 공격 성향을 표출하게 되는데, 힘이 없는 소수자들은 ‘안전한 표적’이어서 희생양으로 삼기에 적절한 대상이 됩니다. 당시 독일이 유태인, 동성애자, 사회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 그리고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식민지 출신인 조선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권위주의적인 사회일수록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만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에 사는 소수자가 차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수자 차별을 얘기할 때 대중매체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텔레비전에서 소수자가 어떻게 등장하고 있는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케이블 채널에서 예전에 즐겨보았던 국민드라마 ‘전원일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여성은 노골적으로 열등한 지위를 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걸 그렇게 재미있게 봤던가 반성이 들 정도였습니다. 50년 전, 100년 전 얘기가 아닙니다. 겨우 2002년에 종영한 드라마였습니다. 이제 드라마에서 여성이 등장하는 방식은 더 이상 과거처럼 재벌 집 아들과 결혼해서 신분 상승을 이루는 신데렐라에 그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방송 전반에 걸쳐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과 다른(사실은 부족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록 최근에 일부 변화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방송사 뉴스에서 남녀 앵커는 앉는 위치(주로 왼쪽에 남성), 다루는 뉴스 꼭지의 성격과 중요성, 그들의 직군과 나이(나이 든 남성 기자와 젊은 여성 아나운서) 등에서 구분됩니다. 기상캐스터도 대체로 여성이 맡고 특정한 의상을 착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에서 장애인은 찾아보기조차 어렵습니다. 인간승리를 이뤄서 성공한 ‘특별한’ 장애인과 도움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불쌍한’ 장애인을 제외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장애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질렀을 때를 제외하면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중국 동포 등을 볼 수 없는 대중매체의 시각은 은연중에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미디어는 할리우드와 CNN으로 표상되는 미국 미디어의 시각에 영향을 받아 흑인, 사회주의 진영, 이슬람권, 제3세계 등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합니다. 흑인을 직접만나서 피해를 본 한국인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갖는 범죄자 이미지, 이슬람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평가 등은 할리우드가 전달해주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소수자 차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만, 1995년에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처음 나와서 읽었을 때 저는 그 책에서 소개한 톨레랑스(관용) 개념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다문화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라면 반드시 채택해야 하는 가치라고 여겼고, 그것을 실천하는 프랑스가 일종의 모범국가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프랑스는 달랐습니다.
   한국에서 월드컵 축구대회 준비가 한창이던 2002년 4월에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의 축구 영웅인 지네딘 지단이 기자 회견을 열어 ‘르펜이냐 지단이냐’를 물었습니다.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르펜이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레 블뢰(프랑스 국가팀)의 대표로 뛰지 않겠다”면서 국민의 선택을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 1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의 당 대표였던 장마리 르펜이 사회당의 조스팽을 꺾어서 2위를 차지했고, 현직 대통령인 시라크와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르펜은 극우 인종주의자였습니다. 프랑스 대표팀에 아랍계와 흑인계 선수들이 많다는 이유로 프랑스 팀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동양인이 가장 열등하며 프랑스인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외국인을 혐오했고 반유대주의자였으며, 나치 시절의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창당한 국민전선은 이민자들이 이슬람 테러와 관련이 있다면서 이민 제한을 공식 정책으로 삼기도 했고요. 결과적으로 결선 투표에서는 르펜이 패하고 시라크가 당선되었지만, 그 후에도 국민전선(현재의 국민연합)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201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버지에 이어서 당 대표가 된 마린 르펜이 또다시 결선 투표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과 정당이 득세하는 프랑스는 홍세화가 전해준 것과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잘못 본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이에 프랑스가 변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일까요? 저는 프랑스가 변했고(사실은 이미 그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지만), 또한 비단 프랑스만의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에서도 극우 정당들이 지방의회 선거에서 꾸준하게 의원들을 당선시켰으며,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극우인 영국국민당(BNP)이 두 명을 당선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잉글랜드방어연맹, 영국독립당, 잉글랜드국민주의당, 영국우선당 등 이름만 들어도 극우처럼 보이는 정치세력들이 영국의 이슬람화 반대와 이민자 추방을 주장하고 있으며, 신나치주의 성향을 보이는 ‘국민행동’은 테러방지법(Terrorism Act 2000)에 의해 아예 테러집단으로 규정되어 금지를 당했습니다. 나치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독일에서조차 신나치주의 운동과 연계가 있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라는 극우 정당이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명을, 그리고 2019년에는 11명을 당선시켰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이런 경향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고요. 본받을만한 선진국이라던 나라들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과 적자생존을 원칙으로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원칙은 승리한 사람을 축복해주지만 패배하거나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배제하죠. 물론 너무 가혹한 배제는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국가는 사회복지를 통해서 이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게 막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증세를 거부하면서 복지 축소를 지향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축소합니다. 그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 로봇과 인공지능의 보편화가 대량 해고로 이어지면서 불평등을 확산시킵니다. 선진국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나락에 떨어지는 사람들은 자기가 해고된 이유, 임금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이유가 오로지 이민자, 새로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여성, 우대정책의 특혜를 받는 소수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가게 됩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조조정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거대한 원인 때문이지만,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 주먹으로 때릴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소수자들은 바로 눈앞에 보이기도 하고 때려도 반격할 힘을 갖지 못한 존재들이어서 손쉬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비선진국에서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대부분의 저개발국에서 빈곤은 더욱 확산되고 빈부격차가 더 커졌으며 기업형 환경파괴가 심화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소수자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IMF 구제금융이 시작된 이후 구조조정의 결과로 실업자가 대거 나왔고 많은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노숙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최하층 계급 또는 바로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우선 해고의 대상이 되었고, 여성들이 퇴출 1순위였던 경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면서 첨단/미래 산업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대)기업에게는 유리하면서도 필연적일 수 있겠지만, 피라미드의 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노동시장에서 영원한 배제라는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
정상을 규정하는 기준은 사회마다 다양하며 시간에 따라 변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불변하는 기준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만약 우리가 규정한 정상의 기준이 너무 협소하면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결과가 생깁니다. 과거에 장애인의 상대 용어인 비장애인을 ‘정상인’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장애인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만약 동성애자의 상대어인 이성애자를 ‘일반인’으로 부른다면 동성애자는 일반적이지 않은, 뭔가 정상에서 벗어난 일탈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자조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의미로 스스로를 ‘일반’이 아닌 ‘이반’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정상과 표준을 좁게 설정하면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을 비정상이 되고 더 나아가 일탈자, 심지어 범죄자로 분류됩니다.
   미국은 많은 점에서 특이하고도 특별한 나라지만 범죄의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2020년 현재 미국의 감옥 재소자의 숫자는 212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1)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중국이 ‘겨우’ 171만 명으로 2위에 불과한 것을 보면, 미국에 얼마나 많은 범죄자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구 10만 명 당 재소자 숫자를 봐도 미국은 655명으로 당당히 세계 1위입니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전체 재소자 수가 5만 4천 명, 인구 10만 명 당 재소자 수가 106명이니까 미국과 비교해보면 매우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감옥에 수감 중인 재소자의 약 절반 정도가 마약 관련 사범이고, 그중 약 1/4이 대마초와 관련된 사범입니다. 그러니까 대략 계산해보면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마초 때문에 수감되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들 중에서 대마초를 피우다가 잡혀간 사람들은 오히려 적고 그와 관련된 범죄, 그러니까 대마초를 팔거나 판매망을 둘러싼 문제 때문에 잡혀간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동안 미국의 여러 정권, 특히 공화당 정권에서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을 부르짖었음에도 대마초 관련 재소자의 숫자는 줄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2016년의 선거에서 미국의 네 개 주가 기호용 대마초를 합법화했습니다. 그전에도 이미 네 개의 주에서 합법화가 되었지만, 이제 각 주에서 대마초 합법화는 일종의 대세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11개 주에서 기호용이 합법화되었고, 32개 주와 워싱턴 DC에서는 의료용으로 합법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대마초를 범죄화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임을 깨닫고 내려진 결정이었는데, 실제로 합법화된 주에서 폭력 범죄의 발생이 줄어든 결과를 낳았습니다. 2018년에 합법화한 캐나다에서도 전체 사용 비율은 2% 증가했지만, 흡연 후 2시간 이내의 운전 비율은 감소했고 미성년자의 사용도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세수부족에 시달리는 미국의 여러 주가 향후 합법화를 더욱 확대해 갈 것으로 예측되고, 따라서 앞으로는 대마초로 인해 감옥에 가는 사람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마초가 무해하다거나 무조건 합법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일탈과 범죄의 기준을 새롭게 정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얘기,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일탈자나 범죄자가 되지 않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주류와 다른 것을 무조건 나쁘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사회에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한 개성과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속성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사람, 일탈자들로 넘치게 됩니다. 다수자가 정한 기준에 강제로 순응하고 동화하라고 요구하는 사회는 그렇게 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부여하게 됩니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는 갈등을 훨씬 덜 겪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획일적인 순응과 동화 요구로 갈등의 길에 들어설 것인가, 아니면 인정과 공존을 통해 평화와 안정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차별 없는 사회로 가는 길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인간 사회 중에서 완벽한 평등을 구현한 곳은 없으며, 다양한 기준에 따른 나름의 불평등 구조가 있습니다. 인류학에서 나온 연구들에 따르면 부와 재산의 개념이 없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거의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사회에서도 나이, 성별, 개인적 기능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에나 불평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좋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당연히 존재하는 다양한 종류의 차이를 이유로 차별을 가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어느 사회나 어차피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에 따라서 불평등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을 누가 규정하고 누구에게 유리한 것인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를 결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정치적인 지배층, 경제적인 부유층, 나이가 너무 많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많은 남성, 비장애인이면서 이성애자인 사람 등일 것 같습니다. 즉 소수자들이 아니라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다수자들입니다. 소수자의 인권은 어쩌면 강자들이 너그러울 때만 고려 대상이 될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권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참 좋고 바람직한, 그러나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이 오랜 시간 동안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근면함, 정책의 적절함, 외부 여건의 도움 등도 있었겠지만, 우리 일부의 희생에 기댄 면도 있습니다. 일종의 내부 식민지를 ‘착취’하면서 이뤄온 측면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착취를 당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서 말하는 농민이나 노동자와 같은 피지배계급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피지배계급 안의 소수자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있을 수 있고, 노동시장 참여조차 허락되지 않으면서도 복지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장애인과 노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학벌에 경상도 출신이고, 이성애자이면서 장애인이 아닌 한국인 남성의 경우에는 반대쪽 끝에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이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어차피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 어떤 측면에서라도 차이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차별의 근거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다양성이 인정되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일탈의 허용 범위가 넓으며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습니다. 반면에 획일성이 강요되고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사회일수록 ‘정상’의 범주가 매우 좁으며 이를 교정하려는 폭력의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으며 폭력적인 해법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의 다양성을 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겠습니다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식의 개선과 제도의 개선이 함께 필요합니다. 인식 개선을 위해서는 교육과 캠페인을 통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제도 개선을 위해서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갖는 속성과 무관하게 존중받아야 합니다.
목차
다양성, 차이 그리고 차별
효율적 삶의 피안(彼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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