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흘람 이야기
전우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교실 교수
그 여학생은 자신의 이름을 ‘아흘람’ 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랍어로는 ‘꿈’ 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아흘람은 필자가 2016년 시리아 난민들 진료 봉사를 위하여 요르단 제라시에 갔을 때 진료의 통역자로 함께 했었다. 19살인 아흘람은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는 어느 한국인 집에서 그 집 자녀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었고, 한 달 전에 요르단의 간호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아흘람은 필자의 정신과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들의 길고도 긴 말들을 아주 열심히 들어 주었고, 그것을 매우 요령껏 나에게 통역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환자들이 울면, 그 환자들의 손을 지그시 잡아 주었고, 어깨를 다독거려 주는 그 태도가 참으로 어른스러웠다. 작은 몸의 아흘람이 자기보다 훨씬 큰 몸집의 환자들을 능숙하게 돕는 모습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리아 난민 진료 장면. 필자와 아흘람, 그리고 환자의 모습


진료를 받으러 온 난민 환자들 모습


   진료의 마지막 날이었던 넷째 날, 환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진료실 아침 시간, 나는 처음으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아흘람에게 질문을 했다. 순간 그녀의 눈에 환한 광채가 났다. 그리고 이슬람과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요르단 출신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라나야 했던 불우한 사람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는 집안이었지만, 온 가족은 모두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이었다. 몇 년 전에는 아버지가,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어머니가 각각 메카 순례를 다녀왔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 메카 순례를 가는 것은 돈이 아주 많이 드는 일이었기에, 아흘람의 부모는 각자 따로 싼 값으로 가는 남자끼리, 여자끼리의 순례자 여행 프로그램을 이용해 갔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직 메카 순례를 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코란에 대한 내용으로 옮겨 갔다. 내가 물었다.

“그동안 코란을 몇 번 읽었나요?”
“수도 없이요.”
“수도 없이? 하루에 얼마나 읽는데요?”
“매일 30분에서 한 시간씩 코란을 읽어요.”
“그렇게 읽는다면 코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데 며칠이나 걸리죠?”
“20일에서 한 달 정도요.”


   그러면서 아흘람은 코란을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아랍어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코란에 나오는 아랍어 단어들은 모두가 다 그 하나하나의 특별한 개념 (concept)을 가지는데, 그것을 단지 사전적인 의미 (meaning)만을 가지고 번역하면, 코란의 그 깊은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속에는 깊은 신앙심과 함께 코란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코란을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그럼 성경을 읽은 적은 있나요? 아흘람도 알다시피 이슬람에는 4대 성인이 있고,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가 그들이잖아요. 그래서 무함마드의 코란에 더하여, 예수의 복음서를 읽어 본 적은 있나요?”
“아니요. 집에 아랍어 성경과 King James Version 영어 성경은 있지만, 아직 성경을 읽지는 않았어요.”


   기독교인인 필자로서, 이렇게 열심히 코란을 읽고 있는 아흘람에게 불쑥 성경을 읽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이 어찌 보면 무례하고, 또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언뜻 이런 제안을 했다.

“아흘람은 지금까지 매일 하루에 30분에서 한 시간씩 코란을 읽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매일 하루 30분에서 한 시간씩 성경을 읽어 왔어요. 우리 한 번 서로 코란과 성경을 바꿔 읽어 보면 어떨까요?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 영어로 된 코란을 사서 앞으로 코란을 읽을 터이니, 아흘람은 이제부터 내가 줄 영어 주석 성경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으면 어떨까요?”


   이 제안에 아흘람은 아주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용하는 영어 주석 성경 한 권을 알라딘을 통하여 주문하도록 한국인 거주자에게 부탁을 드렸다. 그것은 사실 나에게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소위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살아왔기에, 따지고 보면 나에게 기독교와 성경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다가 아흘람에게 성경을 소개하며 보니, 내가 가진 성경과 아흘람이 가진 코란이 갑자기 매우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비교되는 매우 ‘상대적인’ 그 무엇으로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성경과 복음서의 내용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다. 아흘람이 단 한 번만이라도 복음서와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코란과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흘람도 코란의 내용에 대해 아주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단 한 번만이라도 코란을 제대로 읽는다면, 성경과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가 코란을 읽어 보겠다고 말한 것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우리의 느닷없는 약속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
요르단 제라시 전통시장 한구석의 낡은 건물 좁은 방에서 이루어진 이 짧은 대화는 아주 작고도 평화로운 대화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알다시피,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이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중세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수많은 이슬람인들을 머리를 베면서 “크리스투스 도미누스(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라고 외쳤었다. 오늘날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허리에 두른 폭탄의 안전핀을 뽑으면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시다)!”를 외친다.1) 자신들이 믿는 신을 위하여, 그 신을 믿지 않는 다른 이교도들을 죽이고 박멸하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가장 성스러운 의무이며, 신앙심의 표현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9.11 테러 사건 이후, 전 세계는 종교적 정체성이 국제정치적 정체성과 더 극렬하게 연결되어 가고 있다. 그러면서 세계적 갈등과 충돌은 점점 더, 도저히 그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과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1956년에 태어났을 때, 크로아티아는 지금의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등과 합하여 유고 연방을 이루었던 6개 연방 구성 국가 중 하나였다. 이 유고 연방은 5개 민족이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의 3개 신앙을 가지고 4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벌어졌던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이 지역의 평화를 완전히 깨뜨렸고, 잔혹한 전쟁과 엄청난 규모의 인종 청소, 인종 학살이 발생했다. 세르비아 정교회를 신봉하는 세르비아계가 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계 사람들과 이슬람인 보스니아계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진행된 이 내전은 볼프 개인에게도 거대한 충격의 사건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이슬람과 가톨릭·정교회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체험하였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종교들이 얼마나 끔찍한 학살극을 벌일 수 있는지도 보았었다. 그러면서 그는 종교, 인종, 민족, 문화, 이념 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배제하는 현상과 그것을 극복하고 포용하는 현상을 분석한 책 『배제와 포용』2) 을 1996년에 출간하여 세계적인 학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6년, 그는 『알라』 라는 매우 논쟁적인 책을 통하여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는 같은 신임을 주장했다. 즉 ‘같은 신을 섬기는 종교이니, 설사 교리와 전통이 다르더라도 최소한 서로 평화롭게만은 살자.’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는 9.11 이후의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과 증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필자가 아흘람과 요르단에서 그 날 아침의 대화를 가진 것은 필자가 아직 볼프의 그 저서들을 읽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볼프의 책들을 읽고 그날 아흘람과 가졌던 대화의 성격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면서, 그것이 향후 종교 간의 만남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볼프는 그의 책 『알라』3)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을 상대로 선교할 때, 그리고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상대로 선교 (그들은 그것을 ‘다와’라고 부른다)할 때 양쪽이 공히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공동 행동 수칙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4)

“첫째, 그들의 신앙을 당신에게 전할 기회를 줄 준비가 되었을 때만 (당신의) 신앙을 전하라”


   문장의 구조가 좀 복잡하지만 이것을 다시 한번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당신의 신앙을 전할 수 있는 시점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그들의 신앙을 전하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시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기만 하고 상대방의 신앙에 대하여는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면, 당신도 당신의 신앙을 상대방에게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당신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방법으로 그들에게 전하라.”


   이것 역시 좀 복잡한 문장이다. 이것도 다시 풀어 이야기하면 의미는 이런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당신에게 그들의 신앙을 전하는 방식이 어떠하면 좋겠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당신의 신앙을 전하라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나에게 자신의 종교를 소개하면서 그것을 물리적 폭력으로 강요하는 것을 내가 싫어한다면, 나도 나의 신앙을 상대방에게 전할 때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볼프는 이 두 번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하여 설명하였다.

1)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자는 더 힘센 자의 압력 아래 굴복을 강요받는 대신, 자유롭게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엄성을 가진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인간에게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신앙이나 이념·가치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종교적 신앙, 이념, 가치관이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이나 독립성, 인격성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싶어 하는 유혹 앞에 늘 서 있다. 그래서 나치가, 공산주의가, 수많은 독재 권력이, 돈과 관련된 이익들이 그리도 수많은 인간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유혹 앞에서 굳건히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려 애쓰는 그 신앙, 그 이념, 그 가치만이 진정한 신앙·이념·가치일 것이다.

2) “다른 사람에게 뇌물을 주거나 또는 현혹해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앙은 그것을 포장한 껍데기나 그것과 결부된 외적인 보상 (돈이나 지위 같은)이 아닌, 그 자체의 가치로 사람들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선교를 함에 있어서 종교라는 그 본질 자체의 정신과 가치를 전파하여 소개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보다, 이 종교를 받아들이면 어떤 세속적 이득을 제공하겠다는 식의 조건부 보상을 강조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종교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과 가족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겠다는 식의 거래까지 했던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3) “자신의 가장 훌륭한 신앙의 실천과 다른 신앙의 가장 나쁜 실천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위에서 소개한 1), 2)의 내용은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3)의 내용은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즉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할 때는 그 신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 최상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신앙을 이야기할 때는 그 신앙과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최악의 모습을 토대로 이야기하면서 그 둘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장 공평하고 옳은 방법은, 양쪽 신앙과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전제로 하여 함께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신앙도 그 원래 내용은 훌륭하더라도, 그 종교 안에 들어와 있는 몇몇 사람들의 최악의 행동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가진 종교 전체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상대방이 해석한다면, 나는 그것은 잘못이고 오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똑같다. 따라서 종교 간의 만남이 진정한 대화로 이어지려면, 양쪽은 서로를 일단 ‘스스로 이야기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있는 존재’라고 인정해 놓고 대화를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양쪽 종교를 가진 일부 사람들이 저지른 그 종교의 본래적 특성과는 상관없는 추악함으로 인해 각자의 종교가 훼손되지 않는 상태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불필요한 긴장과 증오와 분노 없이 가장 솔직하고 본질적인 대화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 회담, 4자 회담, 6자 회담, 그리고?
그런데 볼프는 위의 내용을 다루면서, 그런 ‘두 사람 간의 만남’이라는 것이 사실은 좀 복잡하다고 이야기한다.5)
   만남을 가지는 당사자로서 당연히 그 만남의 첫째 참가자는 ‘나’이고, 둘째 참가자는 ‘당신’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이 사실은 그런 ‘양자 회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4자 회담인데, 그 회의의 추가 참석자로 셋째는 ‘내가 생각하는 당신에 대한 이미지’이고, 넷째는 ‘당신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만나고 있는 그 현장에는 나와 당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당신의 이미지와 당신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이미지가 있어서, 당사자인 나와 당신보다도 더 큰 목소리를 내면서 그 회의를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만남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그 이미지가 얼마나 정확한가, 아니면 왜곡되었는가가 된다. 편견이나 선입관에 사로잡혀 상대방에 대하여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만남에 들어가면, 그 만남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더라도 그 대화가 건설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양자의 만남 그 자체보다도 먼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상대방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 생각, 판단을 만남 이전에 먼저 철저하고도 정직하게 점검하는 일이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중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하나씩 그 이미지를 점검하는 사전 작업이 있어야만, 그때 비로소 양자 회담, 아니, 4자 회담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노력은 만남을 가지기 전에 미리 마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만남의 현장에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당사자를 직접 만났을 때가 내가 가졌던 이미지, 내가 가져 왔던 오해와 편견을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볼프는 유감스럽게도 (?) 그 만남에는 그 넷만 참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 존재가 더 참가한다고 한다. 다섯째 참가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이미지’이고 여섯째 참가자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양자 회담이 4자 회담으로 바뀌어 그것만으로도 이미 복잡하고 정신이 없는데, 이 회담이 사실은 6자 회담이라는 것이다. 앞의 4자 회담 참석자들도 각자 다들 대단한 힘들을 가지고 있지만, 6자 회담에 새로 참여하는 이 둘의 힘이 사실은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임을 우리는 안다. 각자가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실제로 ‘나’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규정한다. 스스로를 완벽하고 전혀 오류가 없는, 의로운 존재라고 규정하면서 만남의 장소에 나간다면, 논쟁 속에서 의견의 차이가 생겼을 때 확신 속에서 상대방을 바로 오류와 악으로 매도하고 단호하게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스스로를 불완전하고, 일부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진실의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인정하고 규정한다면, 상대방과의 만남을 통하여 내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배우며 수정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기에 만남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두 사람의 만남을 한순간에 극도로 황폐하게 파괴하기도 하고, 또는 풍요롭고 창조적인 것으로 건설하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 인간의 만남’이란 정말 얼마나 복잡하고 거대한 ‘우주들의 만남’인가? 그래서 볼프는 “편견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서 왜곡된 부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6) 고 제안한다.
이중 보기 (double vision), 그 신비한 터널
이상의 내용들은 이론적으로 수월하게 공감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구체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서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잘못된 믿음과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정말 의미 있는 대화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 볼프는 그의 책 『배제와 포용』에서 그 방법으로 ‘이중 보기 (double vision)’라는 방식을 제안한다. 사실 우리가 이미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한자 성구에 따라 알고 있는 개념일 수도 있는데, 볼프가 제안한 제목에 따라 필자가 설명을 붙인다면 다음과 같다.7)

1) “우리는 자신의 외부로 걸어 나가야 한다.”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평범한 (또는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한 것을 검토하는 것’을 말한다. 즉 나 스스로 한걸음 거리를 두고 내가 타인에 대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확고한 이미지, 생각, 판단을 다시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당연한 것이라고 믿어 왔던 것들을 다시 점검하는 것에는 사실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가진 근본적 가치관, 판단, 생각을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나의 근본적 가치관은 얼마든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내가 가진 생각, 의견, 판단 등을 객관적으로 다시 한번 정리하고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프는 이 현상을 ‘한 발은 자신의 안에, 한 발은 자신의 바깥에 두는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두 발을 다 내 안에 두었을 때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던 나의 생각과 판단의 모습들을, 한 발을 밖으로 내민 상태에서 돌아보면 새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우리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거기에서 살아야 한다.”
볼프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즉 내가 상대방이 되어서 상대방의 시각을 가지고 나를, 그리고 자신(=상대방)을 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역지사지(易地思之)적 발상과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항상 ‘나의 시선’으로만 나와 타인을 바라보고 판단했던 것에서 벗어나, 타인의 시각으로 나를 보고 그 타인을 보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볼프는 ‘타자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 보기’라고 표현했다.

3) “우리는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나의 정체성, 가치, 믿음을 버리고 타인의 정체성, 가치,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위의 1)과 2)의 작업을 통하여 가지게 된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가져다 놓고, 과거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생각·판단과 비교하며 생각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타인의 입장에서 본 시각과 이미지, 생각, 판단을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고 무시하려 하였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잘 성찰하고 숙고할 대상으로 여기고 그 작업을 진지하게 하라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것은 상대방의 가치관과 신조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동의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반대의 이유와 내용을 스스로 충분히 더 폭넓게, 즉 타인 입장에서의 시선과 의견까지를 포함하여 폭넓게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하여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생각·판단 중 수정할 사항들이 있으면 수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정되는 사항 중에는 나와 다른 존재를 대하는 태도도 포함될 것이다.

4) “우리는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볼프는 어떤 판단도 최종적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최종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성립된다. 여기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종교가 기본적 원칙은 분명히 제시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디테일에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어떤 것은 신비의 영역 속에 있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의 그런 신비한 특성, 즉 불명확한 특성을 겸허히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타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를 어떻게 섬기는 것이 신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불명확한 것이다. 따라서 각 사람은 그때그때마다 신 앞에서 정직하게 성찰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그런 선택 그 자체가 ‘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은 여건이 달라지면 다시 바뀔 수도 있다. 또는 내 사고의 성숙성이 달라짐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에서의 겸허함’이다. 자신이 선택한 내용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에 찬 태도는 사실 신에게서 가장 멀어지는 일임을 종교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해 준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하면, 그 어마어마하게 세워져 있는 강고(强固)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그런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고,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체제·이념·권력의 무너짐을 보여 주는 역사였다. 이런 이중 보기의 긴 터널을 포기하지 않고 걸을 때, 우리는 마침내 그 터널 끝을 지나 바깥의 찬란한 빛 속에 도달하는 신비를 체험할 것이다.
에필로그
요르단을 떠나 한국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부다비공항에서 아흘람과의 약속대로 영어판 코란을 구입했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낯선 내용이었지만, 이것이 전 세계의 모든 이슬람 사람들을 그렇게도 강력하게 사로잡고 움직이게 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흘람이 언급했던 코란에 나오는 단어들의 그 ‘개념’ 전달이 이 영어 번역본을 통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코란을 읽어 보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아흘람도 성경을 읽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만 같았다. 아랍어를 모르고 이슬람의 내용을 깊이 몰라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내가 본 코란은 성경보다 많은 점에서 부족(?)해 보였다. 아마 아흘람도 성경의 내용이 코란의 내용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느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전혀 다른 경전 하나만을 읽고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비교’가 자기 자신의 종교와 믿음을 더 큰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외국 여행을 나갔을 때 비로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특성이 더 잘 보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인 것 같았다. 괴테는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너무 복잡하다고 느낄까 봐 앞에서 다 이야기하지 못한 내용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볼프가 이야기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참가하는 존재들의 수효에 대한 이야기에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참가자, 즉 자신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타인의 타인에 대한 이미지까지만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볼프는 최종적으로 (이번에는 정말 끝이다) 일곱 번째 참가자가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신(神)이다. 두 사람의 만남 가운데에는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아니든, 인정하든 아니하든, 신이 참석한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자신, 자신이 가진 타인에 대한 이미지, 자신의 자신에 대한 이미지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서로 만나 무언가에 대하여 대화하고 대립하기 시작할 때, 누가 옳고 그른가를 도대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더 힘 있고 폭력에 능한 존재가 주장하는 것이 결국에는 옳은 것이 ‘되는’ 것인가? 볼프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 만남의 최종적인 판단자, 그리고 인도자, 보호자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곱 번째 참석자이신 신(神)을 의식하면서 만남 앞에 서야만, 인간의 만남은 비로소 제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보다 더 힘들고 거친 만남이 있는 곳이 생각에 떠오른다. 바로 한반도이다. 전 세계가 대충 20세기 말에 이미 그 결론을 내린 후 뒤에 놔두고 떠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아직도 20세기식 사생결단의 방법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북한과 남한이 존재하는 지역이다. 결코 서로를 용납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그래서 같은 하늘 아래에 공존할 수 없는, 즉 상대를 문자 그대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존재로 인식하여 진정성 있는 ‘정중한 대화’가 단 한 치도 불가능한 대립의 상황을 우리는 지금도 매일 겪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남북 갈등의 그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판 박아 놓은 소위 ‘남남 갈등’ 역시 천 년을 넘게 이어져 온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불화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볼프가 이야기한 내용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류 정신사의 진보는 자신과 다른 존재를 대하는 생각과 태도의 진보와 궤를 같이한다. 자신과 인종·언어·종교·이념·문화가 다른 존재들을 아예 인간이 아닌, 바퀴벌레처럼 박멸해야 할 존재로 보던 것으로부터, 그들이 인간이기는 하나 매우 열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거쳐, 그들을 ‘차이를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데 도달하기 위하여 인류는 아직도 멀고 먼 여정 속에 있다. 누가 알겠는가? 한반도가 그 극단의 갈등 상황 속에 있기에 그 해결의 역사적 사례를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이슬람과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큰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면, 가장 극단적인 이념의 벽을 가진 한반도에서 그 인류 정신사 진보 여정의 돌파구를 열 수는 없을까?

요르단 제라시에서 시리아 난민 진료 봉사 중인 필자 모습(2016년)


아흘람은 그 사이에 25살의 아가씨가 되었을 것이다. 그 어른스럽고 당찼던 아가씨가 코란과 함께 성경까지 읽으며 더 넓은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 변했을까? 아마도 내가 변한 만큼 아흘람도 변했을 것이다. 아니 나보다 더 훌륭하고 크게 변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목차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생각한다
아흘람 이야기
듣기
화면 설정
arrow_drop_down
  • 돋움
  •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