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
임상 의사가 아닌 보건학자의 삶을 선택했던 것은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만나고 차트에 적힌 병력을 읽어 보면 가난과 가정 폭력으로 인해 우울증이 발생한 게 분명했는데, 병원은 약으로 그들의 증상을 치료하려 했다. 물론 현대 의학이 이룬 성과는 놀라운 것이어서, 그 약들은 실제로 증상을 완화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이들을 종종 삶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증상이 호전된 환자가 살아가야 하는 집과 일터는 과거와 다름없이 폭력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다시 환자가 되어 병원에 돌아왔다.
   진료실과 수술실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그 이상의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건 명확했다. 실습을 하면서 만났던 교수님을 포함한 병원의 의료진은 과도한 노동시간 속에서 환자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병원을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임상의사로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경제력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면 내 고민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부조리한 사회가 질병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게 명확해질수록, 그 대답은 더 무거웠고 또 멀리 있었다.
   2013년 한국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지난 10년 동안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쉼 없이 공부했다. 내게 공부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인간의 언어였다.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것이다. 우리는 손톱 밑에 찔린 가시로 아파하는 옆 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별개의 생명체이니까. 설사 그가 내지른 낮은 신음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그 고통이 우리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메아리 없이 사그라드는 수많은 비명들이 그런 것처럼. 그 고통이 당사자의 몸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비명에 응답해야 한다.
   그 공부는 책상 앞에서 하는 게 불가능했다.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구자의 몸을 고통의 곁에 놓아야 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친구를 잃은 생존학생과 동료를 잃은 생존 장병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동료를 잃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는 소방 공무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정리해고 이후 자살로 세상을 떠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장례식을 찾아다니고, 비과학적 낙인으로 삶 자체를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의 행진에 함께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공부인 이상 그 모든 시간은 책상 앞에서 글로 마무리해야 했다. 분노와 고통의 에너지로 존재하는 경험들을 데이터를 이용해 논문과 책의 형태로 정리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이 내 몸을 통과해야 했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그 경험들과 거리를 두고 냉정함을 유지한 채 학술적 언어로 정리해야 했다.
   이 글에서 나는 10년의 시간 동안 학술 논문과 책의 형태로 내놓을 수 없었던 경험과 고민들을 공유하려 한다. 연구의 형태로 정리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답을 찾지 못한 질문과 마음속에 남아 계속해서 반추하는 경험들을 나누고자 한다. 혹시라도 이 불완전한 글이 자신의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작게라도 위안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Part 1. 공부의 과정
Chapter 1. 공부란 무엇인가:
“그럼 교수님은 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Episode 1. “당신들 지금, 우리 사람들 데리고 뭐 하는 거야?”

M은 탄자니아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연구자였다. 영국에서 보건학 석사를 마친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를 할 것인가 아니면 탄자니아로 돌아가 길을 찾을 것인가. 의사로 일하며 연구하는 삶을 꿈꾸는 그녀에게 영국은 탄자니아와 비할 수 없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그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영국의 연구자들이 탄자니아를 포함한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이미 10년 넘게 치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며 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그런데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역 정부의 보건 담당자들도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는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치매 환자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데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래에도 그 논문들이 연구에 참여했던 이들의 삶을 개선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나와 함께 논문 작업을 하던 M은 말했다.

“난 정말로 이렇게 말하고 싶어. 당신들, 우리 사람들 데리고 뭐하고 있는 거야?”


   M은 영국에서 공부하며, 무엇이든 해 보겠다고 아프리카 현지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지원했다. 그런데 자신보다 연구 경험도 없고 아프리카에 대한 어떠한 활동도 한 적 없는 백인 남학생이 뽑혔다. 물론 그 학생이 자신보다 뛰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M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이 모든 경험이 하나로 읽혔다.

“그러니까,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점령을 멈춘 순간부터 새로운 식민주의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어.”
“승섭, 너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너희 나라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일하고 싶지만, 내 나라에서는 그만큼 발전한 대학이 없어. 그곳에서 연구를 진행하기는 매우 어려워. 그럼 다시 백인들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데, 그러기는 정말 싫거든.”


Episode 2. “평온함은 나무처럼 키워야 하는 거래요”

2020년 부산에서 차별과 몸에 대한 강연을 하고 뒤풀이 자리에 갔을 때, 미얀마에서 온 한 이주 노동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돌아가며 강연을 듣고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동료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 온 그가 말할 차례가 되었다. 한국에서 24년째 일하고 있다고 했다.

“부럽죠. 물론 개인의 능력도 있겠지만, 미얀마에서는 한국처럼 부유하지 않아서 저런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저도 기회가 있었다면 저런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차별과 노동에 대한 공부요. 24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에는 차별을 너무나 많이 겪어서 매일매일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피부가 단단해지는 거 있잖아요. (굳은살이요?) 예.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서 더 이상 예민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괜찮아지지는 않잖아요.) 예. 그래서 평온함이 필요해요. 처음에는 밤에 혼자 술을 먹고 그렇게 풀었는데, 계속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어느 책에서 봤는데 평온함은 나무처럼 키워야 하는 거래요. 마음이 힘들고 괴로우면 사장에게 좋은 말로 할 수 있는 것도 더 거친 말로 하게 되고 내 몸도 해치게 되니까. 평온함을 길러 내고 싶어요”


Episode 3. “그럼 교수님은 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사회운동 단체의 일을 열심히 돕던 한 학부생이 내 연구실에서 석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하고자 하는지 물었다.

“세상을 더 평등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학생에게 그런 목적이라면 대학원 공부를 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공부는 공부인 것이라고. 논문을 쓰다 보면,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상식에 가까운 결론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읽고 정리하고 데이터 분석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도 우리가 가 닿는 자리에는 종종 불확실성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고, 그래서 종종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조차도 온전히 해내는 게 쉽지 않다고 답했다.
  학생은 되물었다.

“그럼 교수님은 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나는 할 줄 아는 게 이거 하나였다고. 그리고 공부가 가진 힘을 믿는다고, 공부가 당장의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속 시원한 말로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지만 인류가 유사한 문제를 두고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쌓아 온 지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얻게 되는 통찰이 있다고. 그 통찰의 힘이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가장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준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모든 논문의 맨 뒤에는 연구 결과의 한계를 서술하는데, 항상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투명하게 밝히는 게 마음에 든다고, 나는 그 한계를 서술하는 부분이 개별 논문의 약점일지도 모르지만, 학술 언어가 지닌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 연구는 이러한 가정 위에서 진행되었는데 그것들이 무너질 경우에는 그 결과는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밝히는 화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답답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만큼 단단한 이야기라고.

Episode 4.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그런 세상이 생겨났다.

사회적 약자의 삶을 연구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역학은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측정하고, 그 부조리한 환경이 약자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그 연구의 중요한 부분은 그 집단이 기득권 혹은 전체 인구 집단에 비해서 어느 정도 건강 상태가 나쁜지를 확인하는 내용이다.
   그 목적을 위해 설문 문항을 설계할 때 근로 환경 조사나 한국복지패널 등과 같이 한국의 전체 인구를 대표하는 조사 결과와 비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진행한다. 그러한 설문지를 이용해 데이터를 수집하면, 한국 사회의 같은 성별, 연령대의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 집단의 건강 상태를 비교할 수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한 비율이 한국 인구 전체에 비해서 몇 배 높은지 검토하는 연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 집단을 연구할 때, 이러한 접근은 건강 불평등의 측면에서 그들이 처한 현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구 시작단계에서 유용하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교도소 재소자1), 병원 전공의2), 화장품 판매직 여성 노동자3)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취약 계층에 대한 건강 불평등 논문을 꾸준히 출판했다. 나는 2016년에 진행했던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데이터를 이용해 동성애자·양성애자 2,335명의 건강 불평등을 측정하는 논문을 출판한 바 있다.4) 지금까지 한국에서 수집된 성소수자 건강 연구 중 가장 큰 규모의 연구였는데, 성별과 연령을 통제하고 국가 대표성이 있는 다른 데이터의 결과를 이용해 성소수자 집단의 건강 불평등을 측정했다. 이 논문에서 한국의 동성애자·양성애자는 한국 전체 인구 집단과 비교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유병률이 6배 이상 높았다. 처참한 결과였다. 논문의 말미에는 성소수자의 건강이 이토록 열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 차별과 혐오를 없애고 건강 불평등을 줄일지 사회가 고민하고 그에 합당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처참함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반동성애 운동 진영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 교수가 한국 동성애자들의 자살 생각과 자살 시도 비율이 높다는 우리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동성애가 이렇게 위험하니 동성애자는 이성애자가 되기 위한 전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말하고 싶었다. 전 세계 어느 전문가 학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비과학적인 주장을 당신 같은 사람들이 교수라는 직위를 가지고 말하고 다니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바뀌어야 하는 건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이 아니라 전문가가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어기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신이라고. 그런 이들은 우리 연구팀이 같은 데이터를 이용해 한국에서 전환 치료가 동성애자·양성애자의 우울증 및 자살 생각과 자살 시도를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인다고 출판한 결과는 읽지도 인용하지도 않는다.5)
Chapter 2. 연구자가 묻지 않아야 하는 질문들:
“사람들 속을 또 파헤쳐서 어쩌려는 건지….”
2015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건강 연구를 할 때, 설문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심층 인터뷰에 참여한 노동조합의 한 간부는 내게 말했다.

“저는 이 연구에 반대했어요. 사람들 속을 또 파헤쳐서 어쩌려는건지….”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일단 억울했다. 이 연구는 노동조합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해고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부탁한 연구였기에 최소한의 비용을 받아 진행해야 했고, 연구팀 중 누구도 인건비를 받지 않고서 일을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또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폭력적인 정리 해고가 남긴 상처에 대해 숫자와 증언으로 말하기 위해서 연구자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아픈 이야기들을 물어야 했고, 그 질문에 응답하는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며 머릿속에서 또 한 번 아픔을 겪어야 했으니까.
   보통 정신건강에 대한 설문지에는 ‘지난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포함된다. 이 질문에 대한 설문 참가자의 응답을 이용하면 한국복지패널과 같이 국가적으로 대표성 있는 설문에 참여한 같은 나이대의 한국인 전체와 비교해서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계속된 해고 노동자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 사건을 연구할 때에도 필요한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설문지를 보는 순간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 항목을 빼 달라고 했다. 이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아픈 경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당장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질문을 넘어서는 어떤 작용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그 우려에 동의했고, 그 항목을 제외했다.
   연구가 피해자 집단의 고통을 가중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폭력이 남긴 폐허 위에서 상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일까?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주한 트랜스젠더 인권 실태 조사를 할 때도 같은 질문을 만났다.6) 설문 조사를 진행한 기간은 2020년 10월이었다. 2020년은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 하고서 온갖 모욕에 시달리던 고 변희수 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해였다. 그 죽음은 거의 모든 뉴스에 등장했다.
   나는 한국의 트랜스젠더들이 변희수 하사의 사망과 같은 사건을 뉴스를 통해 어느 정도 접했고,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연구자로서 궁금했다. 특히 그 사망 기사들에는 온갖 혐오 댓글들이 달렸는데, 그 혐오의 시간들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탐구하여 기록하고 싶었다. 그 주제를 탐구할 수 있는 질문들을 설문지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연구팀에서 몇 차례 회의를 했는데, 연구를 함께하던 대학원생 연구원 중에서는 그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다수였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들은 과연 한국의 트랜스젠더 중에서 그 기사나 악플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고 오히려 되물었고, 그 고통스러운 소식을 다시 상기시키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저울질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데이터를 분석해야 하는 학술 연구에서 변수가 측정되지 않으면 연구자의 말이 단단한 토대를 갖기 어렵다. 모두가 그 악플을 봤을 것이라고 짐작되더라도 실제로 그 경험을 상세히 측정하지 않으면 가능성이 높은 추정이 될 뿐이다. 고 변희수 하사의 사건은 한국의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직장 내 차별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그녀의 사망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는 신문 기사만이 아니라 학술 논문으로, 가능하다면 양적인 데이터를 통해 정리될 필요가 있었다. 설문에 응하는 과정에서 그 시간을 다시 떠올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그 고통의 정도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동안 트랜스젠더 연구를 하면서 설문을 통해 물었던 군대 내 성희롱 경험이나 병원에서의 차별 경험을 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일까? 고민 끝에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만 우리가 그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떤 지식이 생산되지 못했는지는 함께 기억하자고 말했다.
  잘한 일이었을까?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변희수 하사 추모 행사(2021년 3월 6일)
출처: 저자 제공

Chapter 3. 신뢰할 수 없는 연구자:
‘평소에는 만나기 어려운 분’
삶이 위기에 처한 사회적 약자 중에서는 연구자를 반기는 이들도 있다. 모든 길이 막혀 답답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을 찾아와 질문하고 경청해주는 존재들에 대한 반가움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Episode 1. “그 다음에 다시 찾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여 년 전 의과대학 학생 때였다. 당시 내가 산업재해와 관련해 활동하던 작은 모임은 ‘산재 없는 세상 주간’을 주간하고 있었다. 연대 장터를 통해 산업재해 노동자들이 서울 지역의 의대·간호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자리였다. 그 연대 장터는 한국 산업재해의 현실을 알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관해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 몇 년째 그 행사를 하다 보니,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8mm 캠코더를 들고 탄광이 있는 태백 지역을 찾아갔다. 광부에게 발생하는 진폐증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산업재해였다.
   철거 예정이라고 표시된 허름한 집들과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하게 쌓인 석탄가루 더미와 달리 그곳에 있던 말끔한 태백석탄박물관이 기억난다. 탄광이 무너지는 상황을 연출하여 굉음이 울리며 바닥이 흔들리는 공간이 있었다. 모두가 죽음을 면키 어려운 상황을 마치 놀이공원의 기구를 타는 것과 같이 연출해 놓은 게 묘한 느낌을 갖게 했다. 이 상황을 이렇게 연출해도 되는 것인가?
   동네를 돌아다녀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충분한 영상 분량이 확보되지 않아 고민하다, 가까이 있는 전문 병원에 아무 대책 없이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여곡절을 거쳐 광부로 일하다 진폐증을 앓고 있는 한 환자분을 소개받았는데, 자신을 피해자 모임의 총무라고 소개하셨다. 급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그분이 입을 여셨다. 우리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내가 수없이 인터뷰를 했는데, 취재를 한다고 여기에 왔다 간 사람들 중 그 다음에 다시 찾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또 무슨 영상을 찍는다고 하냐?”


   드릴 말이 없었다. ‘저희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순간에도 나는 그 말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그 영상을 가지고 서울의 여러 의과대학을 돌면서 상영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는 연구자에 대한 불신이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연구자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상세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고통스러운 현실에 작은 변화라도 생겨나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연구는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데이터를 수집한 연구자 중 다수는 현장과의 관계를 이어 가지 못한다. 연구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도 힘겨울 뿐 아니라, 또 다른 연구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반복되다 보면, 연구 참여자는 연구자 일반을 불신하게 된다.

Episode 2. ‘평소에는 만나기 어려운 분’

세월호 참사 피해자 연구인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 조사 연구>를 할 때의 어려움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7)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시점은 2014년 4월 16일이었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16년 1월이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가 만들어지는 것조차 참사로부터 1년이 넘게 시간이 걸렸고, 특조위가 발주한 용역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2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생존 학생 부모들을 처음 만난 장소는 안산 온마음센터의 한 회의실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을 두고 부모들은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함께 연구를 했던 교수와 함께 그들의 책상 맞은편에 있었는데, 회의가 끝나고 난 후 처음 5분 동안은 우리 둘을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한다고 느꼈다.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는데, 그 시간 동안의 긴장을 어떻게 풀어 나갈지 막막했다. 처음 만난 그들에게 나는 신뢰할 수 없는 정부가 뒤늦게야 성화에 못 이겨 발주한 연구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눈 맞춤이 시작됐다. 부모 중 대표에 해당하는 분이 나를 당시 소속이던 고려대 교수로 소개하며 ‘평소에는 만나기 어려운 분’이라고 말했는데, 그냥 하신 이야기였겠지만 당시에는 그 말조차 왠지 가시가 돋친 말처럼 들렸다.
   당시 정부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사회 전복을 도모하는 위험 세력이나 마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억지를 쓰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언론이 피해자들을 매도했다. 수학여행을 갔다가 자식과 친구를 잃은 이들의 상처는 참사만큼이나 그 이후의 과정에서 더 생채기가 났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연구자라는 이름으로 세월호 피해자들을 찾아왔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간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낯선 사람들이 연구라는 이름으로 찾아와 당사자에게 충분한 설명 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언론에 공개하는 일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참사 피해자를 찾아왔던 연구자들이 가졌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점점 연구자를 불신하게 되었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꺼내 세상과 나눌 이유가 점점 없어졌다.
   게다가 당시 정부는 특조위의 활동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배정된 연구비가 부족했던 것은 물론이고 이 거대한 재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연구 기간으로 주어진 시간이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 학생과 가족 실태조사를 맡은 연구 책임자로서 길을 찾아야 했다.
   생존 학생의 부모님들은 상대적으로 특조위를 통해 섭외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생존 학생들이었다. 특조위는 생존자의 인적 정보를 파악해야 했기에 그들의 전화번호를 포함한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정보를 활용할 수는 없었다. 특조위로부터 학생들의 인적 정보를 받는 것도 논의가 필요했을뿐더러, 당사자의 동의 없이 그 정보를 이용해 전화를 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었다. 심지어 2014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생존 학생은 이제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어떤 생존 학생들은 그 고통스러운 참사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6개월 내로 섭외, 인터뷰, 분석, 보고서 작성까지 모두 마무리해야 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연구팀은 신뢰를 구축하고 당사자들의 고통스럽고 예민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했던 방법이, 연구 책임자인 내가 연구 첫 한달 동안 안산 단원고 후문 쪽에 원룸을 얻어 그곳에 머물며 사람들을 계속 만나는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려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별일 없이 단원고 근처에 머물면서, 생존 학생들이 모인 장소에서 그들이 내가 와도 된다고 허락해 주면 찾아갔다. 커피숍에 앉아서 예능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곤 했다. 같은 또래에서도 재미없고 매사에 심각한 것으로 비춰지는 나 같은 대학 교수가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뭐든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안타까웠는지, 몇몇 학생들은 인터뷰를 허락했다. 우리와 인터뷰를 마친 학생 중 몇몇이 자신의 친구들을 직접 설득해서 인터뷰를 주선해 줬다. 그렇게 여러 경로를 통해 사전에 인터뷰 참여 동의를 받은 경우에 한해서 연락을 하고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매 인터뷰가 연구인 동시에 우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줘야하는 시험대였다. 생존 학생 19명을 인터뷰했던 것은 놀라울 만큼 헌신적이었던 공동 연구원 교수님들과 연구 보조원인 대학원생들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안산 단원고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 교실(2016년 1월 26일)
출처: 저자 제공



Episode 3. 믿을 수 없는 진보 진영 연구자

2018년, 천안함 생존 장병을 연구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내가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을 연구해 온 사람이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생존 장병들에게는 진보 진영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 매년 3월이면 자신들을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간 후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보수 정치인에 대한 마음이 실망과 배신이라면, 진보 진영에 대한 마음은 억울함과 분노에 가까웠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천안함 사건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음모론자들은 공개적으로 생존 장병들이 진실을 숨기고 있으며 당시의 정부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양심선언을 요구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던 근거 중 대다수가 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자, 그때부터는 ‘전투에서 지고 온’ 것은 맞지 않느냐며 생존 장병들을 비난했다. 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패잔병’ 낙인으로 고통받으며 대다수가 직업 군인이었던 생존 장병들은 반강제적으로 전역을 선택해야 했다. 또한 2018년 연구가 진행되기 이전까지는 생존 장병들이 전역 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한 험난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상이연금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해서 누구도 그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연구팀이 한겨레신문과 함께 연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생존 장병들의 마음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자신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진보 진영으로 보이는 이 사람들이 또 이상하게 천안함 사건을 이용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천안함 전우회 회장이었던 전준영은 본인의 책 『살아남은 자의 고통』에서 ‘김승섭 교수님이 세월호나 성소수자에 관한 연구를 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다소의 불안감을 안겨 준 것은 사실이었다.’고 당시의 감정을 묘사했다. 우리 연구팀은 편지를 써서 우리가 왜 이 연구를 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했고, 심층 인터뷰와 설문을 통해 준 자료를 귀하고 무겁게 쓰겠다는 다짐을 했다.
   생존 장병들이 연구팀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은 연구 결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이후였다.8) 생존장병이 견뎌낸 시간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했고, 여론도 크게 바뀌었다. 2011년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고 2018년까지 7년이 지나는 동안 전역한 32명의 생존 장병 중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이는 6명에 불과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국가유공자를 신청한 이들은 거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나, 연구가 발표되고 2년이 지난 2022년 4월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전역한 34명의 생존 장병 중 21명이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8명은 심사중이었고 나머지 5명은 신청을 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군인들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큰 성과였다. 천안함 생존장병이 버텨낸 시간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군인들이 국가유공자가 되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2022년도부터 단행본 작업을 위해 기존 인터뷰 자료를 사용해도 되는지 연락하자, 몇몇 생존 장병은 필요하다면 인터뷰도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고 답했다.
Chapter 4. 경계인:
당신은 연구자입니까, 활동가입니까

Episode 1. 연구자가 사회운동을 바라보는 자세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시민으로서 연구자로서 함께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들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폭력적이고 잘못된 정리 해고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자살로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마음에 품고 싸우는 과정에서 힘이 되고 싶었다. 그 고통 속에서 놀라울 만큼 따뜻하고 굳건하게 싸움을 진행하는 김득중·김정욱 같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존경했고, 그 사람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긴 투쟁 끝에 모두 직장으로 복귀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싸움에서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반올림의 활동을 지원하고 전문가로서 피해자의 질병이 왜 직업병인지를 설명하는 법정소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암에 걸렸을 때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큰 대기업을 상대로 법정소송에서 이긴다는 게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백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되는 장면을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니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 내는 피해자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반올림은 여러 재판에서 승리하며 반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 인정이라는 중대한 성과를 거두어 냈다.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현실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과 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그 이미 주어진 판에 균열을 가하면서 터져나오는 변화의가능성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뒤 따라갈 뿐이다.

Episode 2. 저는 연구자입니다.

2015년 처음으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한 이후에, 노동조합에서는 드문드문 연락이 왔다. 정리 해고를 당한 사업장에서 수년째 복직 투쟁을 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당해야 했고,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의 싸움이 잊히지 않을까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연구 결과가 많은 언론에 보도되자 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이 힘을 받았다. 그 이후 노동조합은 투쟁의 동력이 약해지거나 싸움의 길이 막막해질 무렵이면 또 다시 연구를 해 줄 수 없겠느냐고 연락을 해 오기도 했다.
   그 상황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대답은 간단치 않았다.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석하고 김득중 지부장이 단식을 할 때에는 공장 앞으로 찾아가 24시간 동안 함께 단식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연구가 개입된 활동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그들의 싸움에 연대를 표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연구라는 영역을 통해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내가 사회 운동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해 어떤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 공부를 업으로 하는 연구자였다. 2015년 첫 연구를 할 때도, 그 결과물이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도움이 되길 바랐지만 그것은 연구자로서 본분에 충실하게 일하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핵심은 학술적 연구성과를 논문이나 책으로 출판하는 일이었다.9) 10) 그 중심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계속 다잡았다.
   2018년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한 연구를 한 차례 더 진행했던 것은 학술적으로 더 깊게 들어갈 영역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고 노동자들의 배우자들이 정리 해고 과정과 그 이후에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해고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그대로 경험하면서도, 해고된 이후 투쟁하는 남편들을 돌보는 역할까지 맡아야 했던 배우자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었다. 며칠 전까지 이웃으로서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남편들의 갑작스런 정리 해고로 직장에 남게 된 ‘산 자’와 해고된 ‘죽은 자’의 배우자로 구분되었고,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경험을 기록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역이라 생각했다.
   연구자로서 내 역할을 논문을 쓰고 발표하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데 한정하는 모습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없는 이들은 연구를 현실 변화를 위한 힘을 모으는 계기로 삼고 싶어했지만, 나는 연구자로서 감당 가능한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마감하려 했다. 2018년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들의 건강 연구를 했을 때도 국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한 후 수십 개의 언론에서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여러 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 모든 요청을 거절하는 나를 두고 활동가들은 아쉬워했다.
   사회단체에서 부탁하는 기고나 강연 요청에도 거의 응하지 못했다. 내가 쓴 책들을 읽고 만나길 원하는 분들께 연구와 교육으로 인해 시간이 없다고 답을 할 때, 모든 이가 그 응답을 이해해 주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경험은 내게도 감사한 것이었고, 내 연구의 성과를 한국 사회에 공유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학자였다. 학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분석하고 정리하고 읽고 쓰며 연구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집과 학교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들을 포기해야 연구자로서 겨우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 1일 단식에 참여하며 김득중 지부장과 함께(2018년 5월 8일)

Part 2. 공부의 결과
Chapter 5. 논문 출판:
학계의 상식과 싸워 나가기

어떤 이야기가 논문의 형태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저널에 출판된다는 것은 그 글이 과학자 공동체에서 정한 ‘과학적 합리성’의 기준을 충족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과학적 합리성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어서, 과학자 공동체의 역사·문화·경험에 따라 다르다. 그런 면에서, 학술적 형태로 출판되는 경우가 드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학계 내부에서도 여러 충돌을 일으킨다. 익명으로 진행되는 연구 지원서 평가와 논문 심사 과정에서 그 충돌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Episode 1. 우리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비판받을 것이다

2016년에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에 연구비 지원을 신청했다. 5천만 원이 안 되는 금액의 연구비였다. 그동안의 논문 출판 실적이 충분했기에, 연구비를 받을 수 있을 않을까 기대했지만, 내 연구는 선정되지 못했다. 아래는 그중 한 심사자가 적은 미선정의 이유다.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상자와 참여하지 않는 대상자가 골고루 분포된 샘플을 구성해야만 이 연구는 대표성을 가진 객관적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상기한 샘플을 구성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구 대상을 선정함에 있어서 다양성을 반영하지 않게 되면 연구 대상자의 욕구를 전체 트랜스젠더의 욕구라고 유추할 수 없게 됩니다.”


   연구팀은 트랜스젠더를 만나 데이터를 수집하는 통로로 1차적으로 성소수자 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아 설문을 진행하고, 서울 등에서 열리는 퀴어 문화 축제, 성소수자 의료 기관 등을 통한 연구 참가자 모집도 고려하려 했다. 물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할 것이라 예상한 통로는 트랜스젠더 인권 단체를 통한 설문 조사 응답이었다. 그러니 이 심사평은 학술적으로 타당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문제는 과연 2016년은 물론이고 2022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한국 트랜스젠더 전체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샘플을 구성하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매우 어렵다. 행정기관의 협조와 충분한 돈·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서울 시민을 대표하는 설문 참가자를 정교하게 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울시민이 몇 명이고 누구인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트랜스젠더 인구가 몇 명인지 추산하는 연구조차 이루어진 바가 없다. 게다가 성소수자 혐오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트랜스젠더 집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는 가능한 통로를 최대한 활용해 연구참여자를 모집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퀴어 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차려서 연구를 홍보했고,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병원을 통해 연구를 소개하는 홍보물을 배포했고, 성소수자 인권 단체를 통해 온라인 설문 링크를 배포했다. 2017년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가 주관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은 2천만 원이 안 되는 돈으로 우리가 진행한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 참여한 이는 347명이었다. 이 347명의 응답이 연령, 소득, 성별, 거주 지역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한국 트랜스젠더 인구 집단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데이터를 이용해서 쓰는 논문에 항상 그 지점을 한계점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이용해 외국 저명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했을 때는 그 대표성 부족을 약점으로 우리 연구를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의 상황에서 이 데이터가 갖는 과학적 가치를 알아봤다. 한국을 대표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347명의 데이터를 이용해 우리는 SCI/SSCI급 국제 학술지에 4편의 논문을 출판했다.11)12)13)14)
   과학적 탐구란 무엇일까? 10년, 20년 뒤 한국의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인구 집단을 연구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이 우리의 연구를 대표성이 부족했다고 지적하며 그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에는 2016년 국가로부터 연구비를 받을 수 없어 시민들의 돈을 모아 진행했던, 347명 트랜스젠더가 참여한 우리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서문에 인용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렇게 우리의 논문을 디딤돌 삼아 더 정확하고 풍성한 연구가 세상에 나올 것이다.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가용한 자원을 활용한 최선의 설명이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말하건대 우리의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Episode 2. “그것의 효과는 한 번의 생리 기간 동안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2018년 백화점, 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연구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의 활동가들과 함께 진행했다. 그들이 소개해 준 현장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심층 인터뷰 속에서 작업 환경과 건강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흘리듯이, 생리할 때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직원들은 고객용 화장실 이용이 금지되어 있었고 직원용 화장실은 건물 지하에 하나씩 밖에 없었다. 그 화장실은 거리가 멀어 가기 어려웠고, 가더라도 칸수가 부족해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은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게 어려워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골몰했다. 그들은 되도록 물을 마시지 않으면서 화장실에 가는 횟수를 줄이려 했다. 계속 말을 하며 고객을 상담해야 하는 판매직 노동자로서 그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성대결절과 방광염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아졌다.15)
   문제는 90%가 넘는 이들이 여성 노동자인 이 업종에서 화장실에 가지 못할 경우, 여성 노동자들이 생리대를 교체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 여성 노동자의 말을 듣고서 연구팀에서는 기존 연구들을 살펴봤다. 여성 노동자의 직장 내 생리위생(menstrual hygiene)을 다룬 학술 논문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떻게 이 주제의 연구가 이토록 없는 걸까?’ 생각하며 설문지에 지난 6개월 동안 생리대를 교체하지 못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과 생리대를 교체하지 못해 피부 질환을 겪은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을 만들어 넣었다.
   연구팀이 논문에서 가졌던 질문은 혼자 일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생리대 미교체 경험이 증가할 것이고, 그 이유는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와 함께, 연구팀이 고민했던 점은 생리대 미교체 경험이 직장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의 우울 증상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우울 증상과의 연관성은 가능성 있는 가설이지만 그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엄밀한 데이터가 필요했기에 우리 연구에서는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논문의 제1 저자였던 박사과정의 학생은 이 질문을 다룬 결과를 꼭세상과 나누고 싶어 했다. 정 그렇다면 뜻대로 투고하고 심사평을 기다리자고 했다. 국제 학술지에 투고한 이 논문을 두 명의 심사자가 평가했는데, 한 명은 내가 살면서 받아 본 심사평 중 가장 호의적인 것이었고, 또 한 명은 학술적 가치가 부족해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편집자는 논문 게재를 거절했다. 논문 게재 거절이야 다반사지만, 후자의 코멘트 중 한 가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생리대 미교체로 인한 경험이 사회심리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더라도, 그것의 효과는 한 번의 생리 기간 동안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Even if the experience might work as a psychosocial stress, that impact continues only one or two days in one menstrual cycle.)


   나는 연구자로서 생리대 미교체 경험과 우울 증상의 연관성을 이 논문에서 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그 근거로 쓰인 이 심사평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제1 저자인 박사과정 학생과 공저자인 하버드대의 교수, 두 여성 연구자와 상의한 끝에 항의 편지를 쓰기로 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생리 기간은 평균 5일로 알려져 있고, 8일까지도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생리를 시작하기 전에도, 원할 때 화장실에 갈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생리대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중요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심사자가 여성 노동자의 생리 건강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의심스럽다.’
   학술지의 편집자는 이 항의에 대해서 형식적이고도 짧은 답장을 했고, 그 이후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심사자가 이 문제를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남성일 것이라 짐작했다. 이후 논문은 생리대 미교체와 우울 증상에 대한 결과를 제외한 형태로 다른 학술지에 출판되었다.16)

Episode 3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했을 때였다. 정책적 대안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복직’에 대한 언급을 했다. 그러자 한 심사자가 아래와 같은 심사평을 남겼다.
   “해고자의 건강을 호전시키는 개입으로 ‘복직’을 제안하고 있는데, 복직·재고용·재취업의 의미가 다 다르므로 정확한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복직은 원래의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심사자의 나머지 심사평이 통찰력 있고 사려 깊은 지적이었기에, 그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아무리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경험한 정리 해고에 부당한 지점이 있고 그들이 복직을 목표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책적 대안을 기술하는 면에서는 현실적 고려를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맞는 말이었다.
   한창 복직 투쟁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는데, ‘논문이 출판되었을 때, 현실 가능성을 이유로 복직을 정책적 제언에서 아예 제외한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라는 생각에 제1 저자인 박사과정 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뒤 해고 노동자들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키겠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심사자에게 답변서를 쓰면서 그 신문 기사를 인용했고, 논문은 게재가 확정되었다.17) 그리고 2020년 김득중 지부장을 마지막으로 그 투쟁을 하던 해고 노동자들은 모두 복직이 되었다.
   나와 그 논문 심사자의 짐작이 잘못된 것이었다.
Chapter 6. 좌절의 경험:
연구자가 만난 현실 변화의 장벽
보건학은 응용과학이다. 이 학문은 현실적 목표가 있다. 인간이 보다 평등하고 온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예방할 수 있는 질병으로, 피할 수 있었던 죽음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어떻게 학문으로 연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보건학의 한가운데에 있다. 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해 부조리한 시스템과 고통 사이의 인과성을 찾는다. 보건학의 학문적 탐구는 그 현실을 바꾸어 내기 위한 과학적 근거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Episode 1. “그 수술을 받지 못해 죽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국에서는 트랜스젠더의 의료 이용에 대한 논문이 전무했다. 나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동안 트랜스젠더 의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트랜스젠더의 건강 연구를 진행하면서, 연구팀이 목표로 했던 현실적 변화 중 하나는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을 한국의 의료보험 급여 항목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2016년 마침 문재인 케어라는 이름으로 의료보험 개편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에서 경제적 문제로 인해 수술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트랜스젠더의 비율을 추산해 내고, 왜 국가가 그 수술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한가를 확인하고자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외국 사례를 검토하는 학술적 작업이 필요했다. 몇 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고,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성과 관련해 문헌 고찰,18) 정책 비교 분석,19) 심층 인터뷰,20) 역학 연구21) 논문을 출판했다. 2017년 이제 충분한 학술적 근거가 있다고 판단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고민을 했다. 그 연구 결과를 세상에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기에 이 주제에 관심이 있던 <한겨레21>에 연락을 했고, 트랜스젠더 인권 단체 ‘조각보’ 분들과 함께 연구 결과를 토론하는 내용이 특집 기사로 나왔다.22) 그리고, 실제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국회와 정부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했지만,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정부에서 오랜 기간 일해서 의료보험 정책을 잘 아는 후배를 만나 물었다.

“한국 사회에서 성전환 수술 보험 적용이 쉬운 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막막하다. 네 생각에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한참을 생각하던 후배는 3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보험에 해당하는 사람의 숫자와 그로 인해 국가가 지출할 비용의 규모가 추정 가능해야 한다. 둘째는 의료보험에 포함되기 위해 대기 중인 여러 질병들이 있는데, 그 심사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얼마나 치명적인 질병인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가 여부이다. 셋째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성전환 수술을 미용 성형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3가지 장벽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첫째와 관련해서는 트랜스젠더 인구 집단의 규모 자체가 추산된 적 없는 한국 사회에서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외국의 통계를 이용해 보수적으로 한국에 적용해 보면, 최소 20만 명의 트랜스젠더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23) 그들 중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의 대다수는 한국이 아닌 태국 등의 나라에서 수술을 받았고,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산부인과와 성형외과 의사들이 수술을 집도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 비용과 숫자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둘째와 셋째는 닿아 있는 하나의 질문이었다. 2019년 하버드에서 연구년을 보내며 메사추세츠주립대학 애머스트 캠퍼스(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에서 초청을 받아 성소수자 관련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강연 당일, 트랜스젠더인 미국인 의대생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전 국민 의료보험이 있지만 성전환 수술이 의료보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에, 그 학생이 이유를 물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 수술을 받지 못해 고통받는 트랜스젠더의 삶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 아니냐고, 고환을 제거하거나 가슴을 잘라내는 수술을 미용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되물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화가 나는지 말을 멈췄다가 중얼거렸다. 그 수술을 받지 못해 죽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들 모르는 것이라고.

Episode 2.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우리가 놓친 가능성들24)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사건은 한국 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기에 어떤 변화가 필요했는지를 이 글에 정리하기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두 사건은 재난 피해자의 삶에 주목하기 이전에 정치적 사건으로 다뤄졌다. 그 과정에서 온 국민을 아프게 한 비극적 고통의 에너지는 구체적으로 한국 사회가 어떤 지점에서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말하지 못한 채, 정치적 싸움 속에서 소진되었다. 그 정치적 싸움의 중심에는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사건의 원인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유를 두고 아직까지도 외인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설사 그 의견을 존중한다 할지라도 해상 사고 이후 해경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못한 참사라는 점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참사 이후 정부의 대응 중 가장 큰 잘못은 ‘해경 폐지’였다.
   당시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해경으로 인해 피할 수 있었던 수많은 죽음이 발생했다. 그 참사의 책임을 물으며 정부는 국민의 생명 보호와 직결되는 해상 안전을 책임지는 조직을 폐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없애 버렸다. 하지만 1차적으로는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고, 왜 해경은 세월호의 승객들을 구조하지 못했는지 조직적 차원의 반성을 담은 모임을 지속하며 그 상처를 해경이라는 조직이 계속 품은 채 나아가야 했다. 세월호 참사의 고통이 거대했던 만큼, 그 지울 수 없는 과오를 내내 되새김질하며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조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했다.
   천암함 사건을 두고서 아직까지 좌초설을 포함한 음모론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의견을 설사 존중한다고 할지라도 천안함에서 사망한 장병들과 동료를 잃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생존 장병들이 군에서 일하다가 다쳤다는 사실은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가를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노동을 하다 사망했거나 병을 얻었다는 측면에서 넓은 의미의 산업재해 피해자다.
   천안함 사건 생존자를 산업재해 피해자라고 부르는 순간, 가라앉은 배가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 주목할 수 있다. 민간인 노동자가 일하다 다치면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 보상받고 치료받지만, 군인이 일하다 다쳐 전역을 하게 되면 상이연금이나 국가유공자 선정으로 보상받는다. 그런데, 2011년에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고, 내 연구팀이 연구를 진행하던 2018년까지 32명의 생존 장병이 전역을 했었지만 그들 중 상이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심사에서 탈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도 자신들이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상이연금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탓이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군인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일한다. 전쟁에 대비하고 수행하는 군대의 특성상, 아무리 주의하더라도 군인은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릴 위험이 크다. 그런데 근무 중 부상을 당했던 군인이 전역할 때, 군대는 상이연금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군 조직에서 생존자를 ‘패잔병’이라고 잘못된 호칭을 사용했던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기 4개월 전 서해에서 교전이 있었고 북한군의 배가 반파되고 북한군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군대가 ‘대청해전’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그 이후, 북한은 계속해서 보복 공격을 할 것을 공개적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기 1주일 전 기무사령관이 북한의 수중 침투 징후를 발견하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해군 조직은 이를 묵살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80년대에 만들어진 천안함이 보유한 어뢰 감지용 소나로 청음할 수 있는 주파수는 9-13kHz였지만, 북한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도 어뢰는 3-8kHz 주파수를 가지고 있었기에 천안함의 장비로 어뢰를 사전에 감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최원일 함장이 즉시 “어뢰 공격을 받았으니 대응 공격을 요청한다.”고 말했지만, 해군의 보고 체계를 거치며 ‘선체 파공에 의한 침몰’로 변경되어 청와대에 보고됐다. 이 내용은 모두 당사자의 증언, 국회 청문회, 군 내부 회의록 공개 등을 통해서 보도된 내용이다.
   그렇다면 천안함 사건은 당시 군 지도자들의 말과 달리, 경계 실패가 아니라 작전·정보 실패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다. 천안함의 장병들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지만, 조직적 차원의 오판으로 인해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 군대는 천안함 생존 장병들을 ‘패잔병’이라고 부르며 이 모든 책임을 가장 약자인 현장의 장병들에게 떠넘겼다. 그 과정에서 재수 없는 몸으로 낙인찍힌 생존 장병들은 ‘너희 둘 모여 있지 마라, 또 배 가라앉는다’는 말을 들으며 군 생활을 해야 했고, 트라우마로 배에 타기 어려웠던 몇몇 생존 장병들은 승진에 필요한 최소한의 점수가 부족해 반강제적으로 전역하며 직업군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해군은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조직적 차원의 반성과 정비를 할 기회를 놓쳤다.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사건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과연 그 이후에 우리는 미래의 ‘세월호 참사’와 또 다른 ‘천안함 사건’을 막을 수 있도록 행동하고 있는지 묻고 답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두 참사의 생존자를 만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부를 했던 연구자로서 나는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다.

천안함 생존 장병의 국방부 앞 시위(2021년 5월 28일)
출처: 저자 제공

Chapter 7. 지식 생산의 불균형:
“판사가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Episode 1.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는 자원이 필요하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하는 싸움은 늘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상대적으로 공정하다고 믿는 법정에서조차 기득권은 유리하다. 자신의 자본으로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언젠가 사법연수원에서 판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한 판사가 내게 말했다.

“교수님, 판사가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저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문제에 대해 다 알지 못해요. 양측이 제시하는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를 보고 그 경중에 따라 판단하는 게 재판이에요.”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는 자원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시간을 사용해 데이터와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공유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야 한다. 기득권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고 더 쉽게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한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할 근거까지 더 많이 갖춘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은 항상 막막하다.
   간혹 약자들의 투쟁을 두고서 왜 더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다른 온건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투쟁을 선택한 당사자들이 온화한 표정으로 우아한 말과 행동을 해 가며 세상을 바꾸는 길을 그동안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유명 기업인이나 연예인처럼 이야기해도 언론과 세상이 귀를 기울여 준다면, 과연 악다구니를 쓰며 울부짖는 사진이 뉴스에 나오는 길을 그들이 선택했을까.

Episode 2. 측정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조사에는 종종 연구 참여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성소수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건강 상태가 어떠한지를 탐구할 수 있는 공공 데이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데이터를 이용하면 학술적으로 더 엄밀한 연구가 가능하다. 외국의 연구자들은 이런 데이터를 분석해 건강 연구만이 아니라, 성소수자의 삶에 대해 분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책과 법을 제시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그런 데이터가 없었다. 그런데 이 부재를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도 엄밀한 학술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 연구팀은 2021년 통계청 승인 통계를 검토해, 전국의 개인 및 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 통계 129건을 추출해 연구 참여자의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문항이 포함된 경우가 있는지 확인했다.25) 그 문항을 포함한 조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포함한 차별금지법 제정이 이토록 정치적 화제가 되는 나라에서, 우리는 한국의 데이터를 이용해 성소수자의 규모를 추정해 볼 수조차 없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가 발표되던 때였다. 한국에서 국가기관이 조사한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첫 보고서를 공유하며, 오랜 시간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해 오던 활동가는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한 중앙 부처 공무원이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성소수자가 진짜로 차별을 받아요? 차별을 받는다는 근거가 있나요?” 아무런 악의 없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보는 그 질문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고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부재하고, 전 국민 의료보험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을 수 없고, 동성 결혼이 불가능하고, 아직까지도 군대에서 동성애자를 추출해 처벌하는 일이 발생하는 나라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한국에서 성소수자의 삶이 얼마나 비가시화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반증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이 겪는 차별이 실재한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종종 버겁다.
Chapter 8.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질문:
진보란 무엇인가
사회적 낙인과 차별 문제를 없애기 위해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배웠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좁히기 어려운 간극을 만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나라는 연구자의 한계였지만, 때로는 보건학이라는 학제의 약점이었고 양적 데이터를 통계기법으로 분석하는 내 방법론의 한계이기도 했다.

Episode 1. “선생님, 왜 또 저를 살리신 거예요?”

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HIV 감염인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2017년 미국 질병관리본부 AIDS 팀에서 공식적으로 U=U를 발표했다. 이 뜻은 Undetectable=Untransmissible으로 HIV 감염인이 치료 약을 꾸준히 복용해서 체내 virus 농도가 일정 수준 미만으로 내려갈 경우,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하는 경우에도 비감염인 파트너가 감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26) 나는 이 내용이 반가웠다. HIV 감염인에게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약을 공급하는 게 잘못된 일이라는 반동성애 운동 진영의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직관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였기 때문이었다. 감염인들에게 필요한 치료 약을 공급하는 게 한국 사회의 HIV 감염인 숫자 증가를 막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는 말이 가능해지니까.
   그런데 토론 자리에서 한 활동가는 U=U 캠페인을 앞으로 내세우는 것이 갖는 위험성을 말했다. 그 말은 HIV 감염인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 있기에, 그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존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 질병에 낙인을 찍고, 문란함을 죄악시하는 사회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언젠가 참여했던 한국에이즈학회 관련 모임에서 ‘에이즈 종식’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불편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동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어려웠다. 물론 HIV 감염과 관련된 낙인을 줄이는 사회 변화의 과정에서 전선이 하나여야 할 이유는 없고, 살아가는 조건에 따라 절실한 질문은 다르고 정답도 하나일 리 없다. 그러나 HIV 감염인에 대한 비과학적 낙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한국에서 U=U를 더 알리는게 가장 효과적인 전략 아닐까?
   그럴 때면, ‘내가 의사이고 보건학자이기 때문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기도 했다. 의학과 보건학은 각기 개인과 집단을 중심에 두고 질병을 이해한다는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두 학문 모두 상식처럼 전제로 삼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것은 질병보다는 건강이,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것이었다.
   과연 모든 개인에게서 죽음보다 삶이 나은 것일까? 언제인가 정신과 레지던트로 일하던 한 친구의 환자가 자살 시도를 반복해서 한 해 동안 응급실로 실려 온 게 세 번째였는데, 의사들이 겨우 살려낸 그가 눈을 뜨자마자 담당 의사인 친구에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 왜 또 저를 살리신 거예요?”


   친구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환자의 자살을 방치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죽음을 의학적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중심에 놓고 보면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질병권의 개념은 질병을 경험하는 인간이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필연적으로 아프고, 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항상 예방할 수 있는 불행한 일이 아니라, 생명체가 살아가고 또 늙어 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은 온전하지 못한 삶인가? ‘치유’되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이들은 내내 그 멍에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가?

Episode 2. 사지마비를 가진 중증 장애인에게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장애의 역사』를 번역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장애인의 자리에서 미국의 역사를 재구성했던 그 책이 한국의 능력주의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27) 미국을 이루는 신화인 아메리칸 드림은 강인한 개인이 온갖 역경을 이겨 내고 자신의 힘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하는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꾸려 내는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강건하고 독립적인 개인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는 장애(dis-ability)를 정의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언제인가 한 장애 활동가는 내게 “한국 사회는 사지마비를 가진 중증 장애인이 지니는 노동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고민에 동의할 수 있었다. 노동의 가치는 경제학적 부가가치 생산만이 아니니까. 인간에게 노동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관계를 맺고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발달장애인을 고용하며 실제 기업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면 그 질문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물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환경에서 일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비장애인의 몸에 맞춰진 근무 환경을 그대로 두고서 왜 장애인에게 같은 수준의 생산성을 보여 주지 못하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비장애 중심주의적인 폭력적인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장애인 역시 장애인을 고용하고자 설계된 사업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준비의 과정과 적응의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모든 비장애인이 취업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장애인이 취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장애인 노동자는 장애인의 사업장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동정과 시혜로 운영되는 사업장이 아니라 장애인이 실제로 노동하는 지속 가능한 기업이 생존할 수 있을 테니까.
   동시에 한국처럼 비장애 중심주의가 사회 깊숙이 뿌리박혀 있고 기본적인 장애인 이동권조차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는 그 준비와 적응이 장애인 개인의 노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도 답도 하나가 아니다. 결국 구체적인 현실과 계속 부딪치며 고민하며 바꾸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Episode 3.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질문

천안함 생존 장병의 트라우마에 대한 책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를 쓰는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기존에 출판한 내 책을 읽던 독자들은 진보적 가치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책은 그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보수가 이용하고 진보가 외면하고 군대가 낙인찍은’ 천안함 생존 장병의 고통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진보 진영 역시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자들의 심리적 죄책감을 덜어 낼 출구를 만들 수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오늘날과 같이 정치적 논쟁 사안이 된 데에는 당시 정권 책임자인 이명박 대통령과 국방부의 책임이 컸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 발생 직후 “내가 배를 만들어 봐서 아는데 배가 생각보다 쉽게 부러질 수 있다.”고 말하며 북한의 공격 가능성을 부정하고 함정 자체의 사고라고 여기던 이명박 대통령이 그해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북한 잠수정 어뢰에 의한 침몰’이라고 민군 합동조사단의 결과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그 의도를 의심하는 건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28)
   2021년 방영된 <PD 수첩-천안함 생존자의 증언> 방송의 유튜브 댓글에는 당시 정권을 비난하는 내용들이 가득했다. 당시 정권과 국방부는 분명 잘못된 행동을 했다. 문제는 그렇게 천안함 사건을 정리해 버리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보수 진영을 욕하는 방식으로 그 사건을 이해하고 지나가면, 진보 진영은 천안함 사건을 대하는 감정적 출구를 찾을 수 있지만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었고, 미래의 천안함 사건을 예방할 수 없었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참사 이후 겪었던 고통에 있어서 진보 진영은 가해자이거나 최소한 방관자였다. 그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생존 장병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던 이들과 그 행동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질문을 찾아 집요하게 물어야 했다. 그게 세월호 생존 학생과 천안함 생존 장병을 연구했던 사람이 써야 하는 글이라 생각했다.

Episode 4. 전선은 하나가 아니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같은 나이와 같은 성별로 살아가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2020년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학생이 입학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젠더 혐오 발언을 하던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 운동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도 뿌리깊은 가부장제 전통이 남아있고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스젠더(트랜스젠더가 아닌)가 아닌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시스젠더 여성은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강자이고 기득권자일 수 있다. 출생 시 정해진 법적 성별이 남성이었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지하는 이들이 사회 속에서 온전히 자신으로살아가기 위해 전통적으로 여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옷을 찾아 입는 행위를 탈코르셋 운동의 맥락에서 반동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지 못해 고통받았던 숱한 시간들 속에서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외모를 꾸미는 길을 찾았던 이들을 두고서,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의 옷을 입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 둘은 같은 시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각기 다른 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미국의 중산층 백인 여성들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서 투쟁해야 했다. 여성은 재생산을 위한 좋은 자궁과 뛰어난 두뇌를 모두 가질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여성을 출산·육아·가사에 묶어 놓으려는 가부장제는 백인 여성에게 잔혹한 탄압으로 작동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투표에 감정적이고 열등한 여성이 참여해선 안 된다는 말을 정치인이 공공 장소에서 하던 시기였다.29)그러나 같은 시기 노예제의 유산이 남아 있던 미국 남부에서 흑인 여성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키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육아는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권리였다. 같은 시기, 같은 나라를 살아가는 여성이라 해도 인종에 따라 육아의 의미는 달랐다.
   낙태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고, 그 판단의 권리는 당사자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낙태를 범죄화했던 많은 정책이 실제 낙태의 감소를 가져오기보다는 낙태 암시장을 형성해 비용을 높이고 전문적인 의료진의 시술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낙태 범죄화는 낙태 감소가 아니라 모성 사망률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또 한편 오늘날까지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발달 장애를 가진 여성들은 아이를 키울 충분한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암묵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가족과 병원에서 낙태를 강요받는다.
   타인의 삶을 내 경험에 따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일은 고 황현산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자기 경험치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전선은 하나가 아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이후 30번째 사망자가 발생하자 노동조합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다. 며칠 뒤 태극기 부대에서 그 옆에 천안함 46용사 순국열사 분향소를 만들었고, 경찰은 두 분향소 간 충돌을 막기 위해 그 사이에 폴리스 라인을 세웠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천안함 생존 장병을 모두 만나며 연구하던 내게도 그 노란 장벽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왜 우리는 둘 모두를 추모할 수 없는가.(2018년 7월 17일)
출처: 저자 제공

Chapter 9. 연구자의 몸:
“나무는 상처 많은 애들이 예뻐요.”

Episode 1. “교수님은 왜 그렇게 사는 건가요?”

연구실 대학원생 한 명이 내 방을 찾아왔다. 따뜻한 인성과 뛰어난 학술능력을 가진 학생이었다. 학생은 화가 나 있었다.

“교수님은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사는 세상을 위해 연구를 한다고 하셨는데, 왜 본인은 주말도 없이 밤 늦도록 일하며 사는 건가요? 몸이 겨우 견딜 수 있는 수준까지 계속 일하는 것은 잘못된 거잖아요.”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가까이서 지켜봤으니 알겠지만, 이렇게 해야만 일이 진행돼. 나만 이렇게 지내는 건 아닐 거야.”
“그럼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를 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요?”


   그곳에서 박사 공부를 할 때는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야 했다고,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아시아인 유학생이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속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경험이 없어서 다른 나라의 경우는 모르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답했다.
   학생은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Episode 2. “감정이입을 하지 마세요.”

“감정이입을 하지 마세요. 그게 참 어려운데, 그래도 최대한 마음의 거리를 두려고 애를 쓰세요. 그래야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어요.”


   세월호 생존 학생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 기자분이 해 주신 이야기였다. 세월호 참사를 오랫동안 취재했던 그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의 고통은 늪과 같다”고 말했다. 한번 발을 디디면,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된다고.
   그 말을 마음에 담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나도 결국 같은 자리에 가 닿았다. 친구를 잃고 살아남은 생존 학생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가 내 삶에 들어와 맴돌아야 했다. 꿈속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세월호에 타는 학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배를 타면 안 된다고 계속 소리를 지르는데,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침밥을 먹다가도 불현듯 인터뷰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라 울컥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스스로의 마음을 챙기지 못했다. 내가 만나는 연구 참여자들이 더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내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그런 일은 비단 세월호 연구만이 아니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천안함 생존 장병, 성소수자 연구 모두에서 반복되었다.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 안에서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숨이 차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다가 몇 번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까치발로 견디는데 나는 계속 웃으며 지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는 화를 내거나 우는 게 더 힘들었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면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 아슬아슬하던 균형이 무너진 것이 2021년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방금 행동은 아빠가 잘못한 거라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됐다.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좀 더 일상을 잘 견디기 위해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세월호 참사 때 아이를 잃은 아버지들이 목공을 했던 게 떠올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집 근처 목공소를 찾아갔다.
   첫날, 목공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서 물었다.

“만들고 싶은 게 있어요?”
“아… 저는 사람들과 멀리 있고 싶어요.”
“잘 왔어요. 그런 사람들이 나무를 만지면 좋아요.”


   온갖 나무들의 이름을 알아 가기 시작했다. 호두나무는 단단하고 우아했고,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향이 좋았고, 느티나무는 편안했다. 같은 소나무라고 불려도 원산지에 따라 색과 결이 달랐다. 난 멀바우(merbau)가 좋았다. 단단하고 무겁고 투박했다. 오래전 철도 침목을 만드는 데 쓰였다는 그 나무를 젖은 손으로 만지면 진한 갈색이 묻어 나왔다.
   나이테를 만지고 있으면, 그 사이사이마다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견뎌 온 시간들이 보였다. 손끝에 닿는 질감으로 그 지나간 계절들을 상상했다. 옹이가 큰 기둥에서 줄기를 뻗어 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상처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나는 옹이가 밖으로 보이도록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손을 내민다는 건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책상과 책장을 만드는 나를 보면서, 목공소 선생님이 말했다.

“그치요. 나무는 상처 많은 애들이 예뻐요.”
목차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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