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의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 드라마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회전문 지나는 것을 어려워하고 타인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며 종종 반향언어를 사용하는 이 ‘낯선’ 존재는 이 사회가 우영우에게 어떤 곳인지를 우영우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한편에서는 이 드라마가 장애인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며 지극히 예외적인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아무리 이슈가 되어도 장애인의 시선을 취해 볼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우영우의 시선으로’ 이 사회를 바라볼 계기가 판타지 없이 과연 주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그토록 서로 다양한 특징과 제각기 다른 어려움을 가진 존재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비장애인’의 시선일지 모른다. 내가 수업에서 만난 장애인 학생들은 저마다 너무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종종 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차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했다. 그런 점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화에 등장한 김정훈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이 드라마는 불쑥 우영우를 향한 시청자들의 공감과 애정이 김정훈을 향해서도 똑같이 작동할 수 있겠냐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우영우를 보면서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알게 됐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비장애인이 그러하듯이 같은 ‘자폐 스펙트럼’ 안에도 우영우와 김정훈처럼 저마다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전혀 다른 특징과 성격을 가진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고 말했다.
‘다양성’이 화두가 될 때마다 사실 나는 일종의 우려나 불안 같은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다양성이라는 말이 너무 아름답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 말이 아름다운 만큼 종종 너무 쉽게 말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성이라는 말이 품는 세계에는 왠지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우영우까지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힘이 세고 의사소통이 힘든 거구의 김정훈이나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나선 장애인에게, 그 다양성의 세계는 문을 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눈만 뜨면 보이는 수많은 갈등과 적대, 폭력의 차원들을 ‘다양성’이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걱정스럽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한다거나 다양성을 포용한다거나 할 때 그 인정과 포용의 주체는 누구이며 대상은 누구인가의 문제는 종종 누락된다. 그러니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인정과 포용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간극이 더 벌어지게 될 위험을 생각하게 되곤 한다.
가족의 다양성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가족의 다양성은 가족 관련 법과 제도는 물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책을 논할 때 종종 언급되는 주제다. 그러나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포괄할 수 있는 다양성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논쟁적인 문제다. 조손가족이나 한부모가족을 떠올리면서 가족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사람이 동성애로 이루어진 가족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기도 한다. 혼인과 무관한 동거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비혼 동거 관계에 어떤 권리를 얼마만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다. 다양성이라는 말은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피상적일 수 있으며, 이 무수한 갈등과 첨예한 쟁점들을 직시하기보다는 피해 가게 만들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에 관해 이야기할 때나 가족에 관해 이야기할 때나 주어져 있는 현실 자체가 이미 다양하다는 점이다. 다양성은 인정이나 포용의 차원, 규범이나 지향의 차원이기 이전에 사실의 차원이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정부의 정책이나 법과 제도가 포용하든 포용하지 않든, 편견이나 거부가 줄어들든 줄어들지 않든, 이미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다양하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