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대 초기역사에 담긴
박애정신과 다양성
이헌정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고대의대의 설립에 이르는 과정과 성장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다양성의 고려 와 존중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우리나라 의료환경은 서양의료 도입 초기로서 매우 열악했 다.그중에서도여성은남성의사에게진료를받을수없는유교관습의높은 벽으로 인해 의료 혜택을 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므로 여의사가 절실 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해외 의료선교사 또는 해외 유학으로 의사가 되어서 국내에 들어온 여의사는 매우 소수였으며, 국내에 설립된 의사양성 기관들도 모두가 남성만을 위한 것이었다. 남녀유별의 문화와 그로 인해 남성 의사만 을 양성하는 의학교육은 여성의 건강권을 더욱 위협하였고 이 상황에서 모성 보호는 어불성설이었다. 당시 서양의료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세워진 의 과대학중에박애의실천을목적으로하지않은곳이어디있으랴.하지만소 외된 여성의 건강권과 모성보호를 아우르는 다양성의 가치와 박애 정신을 구 현하고자 한 고대의대의 초기역사와 이에 기여한 이들의 헌신은 매우 특별한것이다. 본고는 서양의료의 도입초기 우리나라 남녀의 의료 불평등의 문제와 이를 극복하고자 일생을 바쳤던 역사 속 주인공들에 관한 것이다.
서양의료 도입초기
여성의 의료현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서 서양의료의 도입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의료선교 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열악한 의료현실 속에서 여성은 서양의료의 혜택을 받기가 더욱 어려웠는데, 그것은 우선 당시의 유교 관습상 남녀 환자 가 같은 장소에서 진료받기가 어려웠고, 또한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보이고 진료를 받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 듯 당시 여성들의 어려운 의료환경은 여성만을 위한 진료시설과 여성 환자를 치료할 여성의사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요구를 가져왔다.
   이러한 의료현실은 초기 외국 의료선교단의 입장에서도 예상치 못한 문 제였으며, 이에 따라 1886년 제중원(濟衆院)의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은미국장로회선교본부에여성환자진료를위해여성의사의파견을요청 하였고 제중원에 부인부를 신설하였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이화학당의 윌 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이 미국 감리교 선교회에 여의사 파견 을 요청하여 1887년 서울 정동에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개설하게 된다. 그에 따라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 Bunker) (제중원 1886년), 메타 하워드(Meta Howard) (보구여관 1887년), 릴리아스 호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 (제중원 1888년), 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 Hall) (보구여관 1890년) 등이 국내에 파견되어 의료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하지만 전체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건강과 중요한 모성보호를 극 히 소수의 여성의사가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 사 숫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여의사의 필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여의사 양성을 위한
초기 시도
국내에서 여의사 양성의 시도는 서양의료 도입 초기부터 있었다. 우리나라 최 초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의학 교육은 19세기 말 보구여관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메타 하워드의 귀국에 따라 후임으로 1890년 보구여관의 책임자로 부 임한로제타홀이이화학당학생다섯명을조수로쓰면서의학을가르친것 이그시작이다.당시홀의일기장을보면여의사가절실했던당시사회적현 실에서 이들을 의료인으로 키워내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 학생들 중에 최초의 한국인 여성 의사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김점동 (박에스더)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아서 의사가 된 것은 아니었고, 로제타 홀의 도움으로 1896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00년 미국의 볼티모어(Baltimore)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 었다. 의사가 된 후 바로 귀국하여 1년 반은 보구여관에서 이후에는 평양의 기홀병원(紀忽病院)과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 불철주야 환자를 돌봤던 박에스 더는 과로로 인하여 결핵에 걸려 안타깝게도 1910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박에스더 이후에 한국인 여의사 양성은 18년의 공백기를 거쳐 일본 유학을 통해 이어진다. 1918년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동경여의전)를 졸업한 허영숙이 그 첫 인물이다. 허영숙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 으며 1920년부터 서대문에 의원을 개원했다. 그 외에도 1920년대 동경여의 전을 졸업하고 귀국한 여의사로는 정자영, 현신덕, 김복인, 변석화, 길정희, 한 소제, 유영준 등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드디어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아 의사가 된 이들이 처음 탄생한다. 이는 로제타 홀이 운영하던 평양의 광혜여원의 이른바 여의사 양성 반에서 의학교육을 받던 이들로 로제타 홀의 노력으로 1914년에 경성의학전 문학교의 전신인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1918년 강습소 2회 남학생들과 함께 졸업 후 의사검정고시를 거처 의사가 되 었다. 김해지, 김영흥, 안수경이 그들이다. 이후 김해지와 김영흥은 평양의 기 홀병원에서 근무하였고, 안수경은 서울 보구여관의 후신인 동대문부인병원 에서근무하였다.하지만,이들세명이졸업한이후로는더이상여학생의의 학강습소 청강이 불허되어 이 경로를 통한 여의사 양성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역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당시 남녀유별의 관습이 가로막은 것이었다.
여성의 건강불평등과
여자의학교 설립의 열망
남녀유별의 유교적 관습은 단시간 내 바뀔 수 없었기에 여성의사의 부족은 바로 여성의 의료 불평등으로 직결되었다. 로제타 홀은 다방면의 사람을 만 나 여의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여학생의 입학을 간청하였으나 역시 관습의 벽을 뚫을 수 없었다. 또한 이화여자전문 학교에 가사과 신설논의가 진행중일때, 의과도 같이 신설할 것을 간곡히 청원하였으나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여의사의 필요성은 점차 사회적 문제로 더 대두되었다. 1926년 모 신문에 실린 여의사 현신덕의 글은 그 당시의 상황을 잘보여준다.

“조선에 女병원이 필요한 이유 - 근래 서양 문명의 영향으로 여자교육이 다소 보급되는 중에 있지만 실제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여전히 여자는 사회인이 되지 못하고 가정인이 다. (..중략..) 다수가 과학적 지식에 애매하고 위생에 무식할 뿐 아니라 옛적부터 내려오는 풍습, 습관이 이러하니 이 부녀의 생명을 위하여 여의사가 필요하다. (..중략..) 남자와 여 자는 공동으로 병원을 경영하게 되면 조선의 일반부녀들은 그 병원은 남자 병원과 다름없이 생각이 들게 되므로 여자가 경영하고 여자환자만 보는 병원이 필요하다”
(기독신보 1926.12. 1)


   이화학교 교의로 있던 유영준의 글도 그 당시의 상황과 여의사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의 여의학교- 조선은 본래 예의지국이라고 하야 남녀 구별이 특히 심한 나라인 것 은 누구나 물론 아는 바이다 (..중략..) 現下 조선에 있어 반드시 여의학교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1)남자에게는 필사하고 진찰을 받지 않으려는 여성들(..중략..) 2)반개하여 중간에 고립한 여성들(..중략..) 3)소아에 관한 모든것과 위생 및 그 신체 고장을 잘 헤아릴 사람은 부모인 여성들 (..중략..) 4)여자의 사정은 여자라야만 그 아는 바 심각하고 (..중략..) 과부의 설움은 동네집 과부가 안다는 것과 같이 날마다 당하고 보는 우리 여의사라야 더욱 절통할 것이다. 現下 조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위대한 사업은 여의학교 그것이다.”
(기독신보 1926. 12. 8)


   이렇듯 시대적 상황은 여의사 양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 한 필요성이 현실에서 성취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드디어 여의학교가
탄생하다
로제타 홀의 노력과 이에 따른 여의사들과 유력인사들의 동조에 의하여 1928년 5월 19일 오후 7시에 서소문에 위치한 김병원에서 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발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로제타 홀의 취지설명 후 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안이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날 모임은 홀을 비롯하여, 그간의 여의학교 창립을 위해 노력한 여러 인사들이 참가하였다. 이 자리에서 창립기 성회가 조직되었으며, 로제타 홀을 비롯하여, 정자영, 허영숙, 최동, 김순복, 이 은라, 김탁원, 백인제, 안수경, 김영섭 등 10여명이 이사로 선출되었다. 첫 이사 회에서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이전에 초기 사업으로 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9월 4일부터 강의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강습소의 소장에는 로제타 홀이 추대되었고, 부소장은 길정희가 맡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 나라 최초로 여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1928년 9월 4일 드디어 조선여자의학강습소 개소식이 열렸다. 이날 창신 동 교사에서 열린 개소식에는 로제타 홀과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김탁원, 길정희, 그리고 아펜젤러(Appenzeller) 목사 부부 등과 기성회 인사 들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로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의학교 육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강습소는 과도기 형태였으며 이후 정식 전 문학교로 승격시켜 나갈 예정이었다.
강습소의 한계와
전문학교로 승격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의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 이었지만 정식 전문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년 소관 총독부 학무국에 설립 인가 신청을 해야만 했고, 졸업생들은 총독부 주관 조선의사시험에 응시를 하여 자격을 따야만 했다. 당시에는 1914년부터 시행된 조선총독부 의사 시험이 있었고, 여자의학강습소의 졸업생들도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 었다. 여자의학강습소의 학생 수는 첫해 17명이 입학을 하였으며, 매해 15명 정도의 입학생을 받았다. 그러나 도중 하차도 많아서 1933년 당시에 재학생 35명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1941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경성여의전)에서 발간한 학교 연혁을 보면, 1928년 개소로부터 1938년 경성여의전 설립까지 여자의학강습소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하여, 조선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된 사람의 수가 11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와 학생들(1928~1933)


   1933년 로제타 홀이 정년퇴임하여 본국으로 귀환한 이후, 감리교 선교회 의 지원이 끊기면서 여자의학강습소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후임 강습소 2대 소장은 길정희의 남편인 김탁원이 맡았다. 일제는 재인가 과정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인가를 내주기 않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김탁원은 정식 의학전문학교로의 전환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김성수, 김종익 등 교육에 관심 있는 명망가를 찾아 다니며 정식 의학전문학교로의 승격에 도움을 요청했다.
   1937년 5월 6일 순천의 부호 김종익이 임종을 앞두고 거액의 재산을 여자 의학교육을 비롯한 사회사업에 희사하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김종익의 기부 는 실로 큰 금액이었다. 이에 힘입어 1938년 5월 1일 경성여의전이 개교하게 되었다. 1890년 로제타 홀이 보구여관에서 의학교육을 처음 시작한지 48년만에 이뤄진 쾌거였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 개강식(1928년 9월 4일). 앞줄의 左로부터 셋째가 로제타홀, 여섯째가 김탁원, 뒷줄 20 左로부터 첫 번째가 셔우드홀, 다음이 아펜젤러 부부


   이후 경성여의전은 해방 후 서울여자의과대학을 거쳐, 의료현장에서 남녀유별의 관습이 사그러진 이후 비로서 1957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수도 의과대학이 되었으며, 이후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1971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져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여성의 의료 불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자신의 일생을 바친 이 들이 있다. 다양성의 가치를 보여준 이들의 면면을 기억하는 것도 그 혜택을 본 후대인들의 소임일 것이다.
우리나라 여자의학교육의
은인들
일생을 바쳐서 박애를 실천한 로제타 홀

“네가 인류를 위해 봉사하길 원한다면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 매리 라이언(Mary M. Lyon)


   로제타 홀은 1865년 9월 19일 뉴욕의 설리번 카운티 리버티(Liberty, New York)에서 태어났다. 일 년간의 초등학교 교사 생활 후, 의료 선교사에 뜻을 두어 1886년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가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에 자원하여, 1890년 25살의 젊은 나 이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로제타 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교적 관습으 로 죽어가면서도 남성에게는 진료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자 로제타 홀은 진료뿐만 아니라 초기부터 우리나라 여의사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책임짐과 동시 에 이화학당 학생 5명을 조수로 쓰면서 의학을 가르쳤다. 1892년에 의료선 교사인 윌리엄 홀(William J. Hall)과 결혼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윌리엄 홀은 1894년 11월 청·일 전쟁 중에 평양에서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다 발진티푸스 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당시 둘째 이디스를 임신 중이었던 로제타 홀은1894년12월남편의사망충격에따른휴양과출산을위해고향미국으 로 귀국길에 오른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보구여관에서 의학을 가르쳤던 학 생 중 박에스더를 같이 미국에 데려가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게 하였다.
   로제터 홀은 3년만인 1897년 11월 다시 돌아와서 평양에 세워진 남편을 기리는 기홀병원을 운영하고 1898년에는 그 옆에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세 웠다. 하지만 1898년 5월, 4살 난 딸 이디스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로제타 홀은 1900년 평양에 맹인학교를 세웠으며 최 초의 조선어 점자 교재 개발을 하였고, 농아를 위한 특수교육을 시작하였으 며, 또한 1921년 인천에 인천부인의원(지금의 인천기독병원)을 건립하였다. 이 렇듯 로제타 홀의 박애정신은 여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각 및 청각 장애인 으로 이어졌다. 실로 시대를 앞서 성별과 장애를 뛰어넘은 다양성의 실천이라 할 만하다.
   아들 셔우드 홀은 1893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으로도 알 려져 있다. 1911년 18세의 나이로 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 토론토(Toronto)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결핵학을 전공했다. 1926년 역시 의사인 아내 매리언 버텀리 홀(Marian Bottomley Hall)과 함께 우리나라로 귀환하여 해주에서 병 원과 결핵요양원을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는 등 결핵 퇴치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홀 가족이 행했던 많은 일들 중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숙원사업은 여의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1933년 로제타 홀은 68세에 43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1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쪽진 머리에 한복을 즐겨 입었다한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한 후 소원대로 그리운 한국땅에 안장되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남편, 아들, 딸, 며느리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김탁원, 길정희 부처(夫妻), 위기의 여의학교를 지켜낸 의인
김탁원은 일생을 민족을 위해 산 애국자였다. 그는 1898년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가난으로 학업을 잇기 어려웠으나 검정시험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하였다. 졸업반 때 기미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적극 참여한 이유로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후 제적당했다가 다시 복교되어 동기보다 2년 늦은 1921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곧 정신의학 전공을 목표로 동경 국립정신병원에서 1년간 근 무하였고, 중국 북경의 협화병원에서도 근무하였다. 김탁원은 우리나라 최초 의정신과의사이다. 그는 역사, 정치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박영효, 이인 등 정치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신간회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함남 영흥에서 ‘에메친(emetine) 중독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 제가 폐디스토마 환자 105명에게 인체시험 목적으로 에메친을 주사하여 5명 사망, 6명 중태, 93명을 마비상태에 빠뜨린 사건이다. 총독부는 이를 숨기려 했으나 중독사가 의심되는 상황이었고, 동아일보는 에메친으로 폐디스토마에 대한 효력을 인체 실험한 의혹이 있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여론이 들끓어서 한성의사회에서 진상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위원회에서 박승목, 김탁원을 현장에 파견하였으며 조사 끝에 중독사임을 밝혀낸다. 이로써 영흥, 해남 등지에서 반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후 김탁원은 일제 어용 의사단체인 '경성의사회'에 대응하고자 만들어 진 '한성의사회'에 2회에 걸쳐 회장으로 당선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로제타 홀에 이어서 2대 여자의학강습소 소장을 맡아서 결국에는 1938년 여자의학전문학교가 탄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경성여의전 설립과정에서 초대 교장인 사토 고조(佐藤剛藏)는 김탁원에게 교무주임 자리를 권하기도 하는데 그의 항일투쟁 경력으로 인한 일제의 반대로 교수로 임명될 수가 없었다. 이후 김탁원은 일제의 억압이 한창이던 1939년경 42세의 젊은 나이에 간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그러나 그의 민족애와 여의사 양성을 위한 노력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여자의학강습소를 세운 공로자들. 왼쪽부터 길정희, 로제타 홀, 김탁원 (로제타홀 정년퇴임무렵)


   길정희는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의 손에서 길러졌다. 조부는 정3품의 관직을 지낸 분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으로 손녀의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조부의 도움으로 길정희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여의전에 입학하였다. 1923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경여의전 재학시절 자신을 찾아와 여의사 양성 문제를 상의한 바 있던 로제타 홀을 찾아가서 함께 여의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1925년 김탁원과 결혼을 하였으며 로제타 홀을 도와 마침내 1928년 여자 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부소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33년 홀 여사가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남편 김탁원과 함께 1938년 경성여의전이 설립될 때까지 여자의학강습소를 운영하였다. 길정희는 1981년에 “나의 자서전”을 출간 하여 한동안 역사에서 묻혀 있던 여자의학강습소를 다시금 조명받도록 하였다. 1990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재산을 여의학교 완성을 위해 기부한 김종익의 장거(壯擧)
김종익은 1886년 순천의 부호인 김학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20세 가 되기까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학에 전념하였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되 자 1909년 24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잘 알아야 한다며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3년 명치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김종익은 아버지의 정계, 관계로의 진출 권유를 뿌리치고 재계로 진출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정계, 관계로의 진출은 곧 일제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1918년 제지 사업과 미두(米豆)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빈민구제 사업을 위하여 적십자사에 많은 액수의 기부를 하였으며 나병협회에도 거액을 기부하였다. 보성전문학교 30주년 때는 새로운 교사 건립에 1만 2천원의 큰 돈을 희사하는 등 특히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보성전문 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성수는 당시 여자의학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로 키우기 위하여 백방으로 애쓰고 있는 김탁원에게 김종익을 소개했으며 1936 년 김종익이 기성회의 이사로 참여했다.
   1937년 4월 김종익은 이질로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에 입원하였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서 김종익은 5월 6일 저녁에 거 액의 재산을 사회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유언으로 기부한 돈은 총 175만원이었다. 당시에 이 금액은 총독부 당국에서도 깜짝 놀랄 정 도의 큰 돈이었다. 그 무렵 일본인 부호 1백 명이 모여서 설립한 조선상업은행 의 설립 자본금이 477만5천 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규모를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의학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여자의학전문학교의 승격과 부속결핵요양원을 세우 는 데에 65만원이라는 거금을 희사한 것은 그가 생전에 총애하던 장녀 평수가 여고 재학 중 결핵으로 사망한 데 대한 슬픔과 의학 발전의 염원이 동기가 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정식 의학전문학 교로서 개교하게 되었다.

   고대의대의 역사는 이렇듯 선각자들의 시대를 앞선 숭고한 정신, 인류를 위한 헌신과 기부의 결과이다. 그것은 로제타 홀 가족의 박애와 다양성 존중 의 정신, 그리고 홀과 함께 남녀, 신분, 동서양의 차이를 넘어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행보를 함께 하였던 김탁원, 길정희 부부의 헌신, 그리고 여자의학 전문학교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 김종익의 숭고한 기부가 어우러져 시작 된 역사이다. 민족과 박애, 다양성, 그리고 나눔과 기부라는 고대의대 역사 속 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헤리티지는 오늘 고대의료원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 어졌다. 그리고 위대한 역사는 2028년 설립 백주년을 맞는 고대의대에게 이렇게 묻는다.

“고대의대의 심장 속에 시대를 앞선 선각자들의 크고 넓고 따뜻한 마음이 고동치고 있는가?”
“위대한 전통을 만들었던 그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마중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목차
고대의대 초기역사에 담긴 박애정신과 다양성
죽음 후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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