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돌봄국가
김희강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최근 ‘새로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한국사회는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한지 오래입니다. 인구구조, 가족형태, 산업구조가 변했으며, 고령화, 출산율 하락, 돌봄위기, 고용률 하락, 임시직 증대와 같은 소위 신사회적 위험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복지국가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변화와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보다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이 대두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 진정한 복지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조차 새로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활발하게 진행중입니다.
   특히 코로나 19의 여파는 한국사회가 지향하던 유럽 복지국가의 허점을 일면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일을 포함하는 사민주의 복지국가뿐만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의 유럽 북구 복지국가가 코로나 19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우리는 목도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도대체 복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가는 왜 존재하는지,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하고 무엇을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지 다시금 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재분배를 통해 시장을 규제하는 국가가 복지국가일까요? 사회권적 권리로서 국민의 일정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국가가 복지국가일까요? 시장을 규제하고 생활 수준을 보장하는 국가도 중요하겠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현재의 복지 국가가 잊고 있었던, 그러나 더 나은 복지국가라면 고려해야 하는 다음의 지점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의존성
모든 인간은 태어난 후, 고령으로 죽음을 맞기 전, 장애가 있을 때, 아플 때, 예외 없이 의존적입니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생을 이어왔으며,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현재도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에 생을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존의 시기에 누군가의 돌봄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생존하거나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가 언제나 참인 것처럼, 살아있는 인간의 의존성도 인간 존재에 내재된 언제나 참인 명제입니다.
   따라서 의존이라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하는 과제도 아닙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는 존재론적 사실일 따름입니다. 물론 의존의 범위와 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장애로 평생 동안 의존적인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누구는 태어난 후와 죽기 전의 기간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비의존적인(독립적인) 삶을 지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 의존의 시기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결국 의존적이라는 사실은 의존을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 보편적인 것, 정상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노인, 환자, 장애인이 의존적이라 낙인찍혀 차별, 배제,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신생아의 의존이 정상적인 것이듯, 중증 장애인의 의존도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영유아의 의존 기간을 겪었듯, 누군가는 이 같은 의존을 좀 더 길게 경험할 뿐입니다. 장애는 그 자체로 우연적인 것이겠지만, 장애를 만드는 것 즉, 장애를 장애로 보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비의존적이고 자율적이며 자립적이다’라는 자유주의 명제는 일면 허구이며 가식입니다. 어쩌면 이는 인간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상태(state of nature)에서 버섯처럼 솟아난다고 주장한 정치철학자 홉스(Thomas Hobbes)의 생각은 완벽히 틀렸습니다. 버섯처럼 솟아난 개인들이 상호교환과 계약으로 시장을 만들고, 이들이 뜻을 모아 정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장과 정부를 신봉한다면 허구속에서 만들어진 제도와 조직에서 삶을 살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허구속에서 정상적인 의존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되며,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게 됩니다. 이러한 허구는 의존에 따른 돌봄필요(care needs)를 가차 없이 천대 합니다.
인간의 돌봄필요
의존이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 보편적인 것, 정상적인 것이듯, 돌봄을 받는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 보편적인 것, 정상적인 것입니다. 의존적인 인간은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로부터건(어머니건, 간호사건, 먼 친척이건, 유모건) 내가 돌봄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생존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나의 정체성도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돌봄 의존적이라는 사실은,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를 담보합니다. 의존의 시기에 돌봄을 받지 못한다면, 취약한 의존인(dependents)은 생존하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취약한 의존인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외면할 수 없는 윤리적인 의무가 존재합니다.
   인간의 의존성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생애주기에 따라 (또한 장애와 질병으로 인해) 존재하는 의존인의 생물학적 의존성입니다. 이는 불가피한 의존(inevitable dependency)이라 불립니다. 피할 수 없는 의존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윤리적 의무가 발생합니다. 의존인을 돌봐야 하는 윤리적 의무는 주로 돌보는 사람, 즉 돌봄 제공자에게 부과됩니다. 돌봄 제공자가 돌보는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현재 생존해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돌보는 사람이 갖는 의존성입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은 돌보는 행위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집니다. 이는 어떤 생물학적 속성에 기인하는 의존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기인하는 의존입니다. 그래서 이는 파생된 의존(derived dependency)이라 불립니다. 돌봄 제공자의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돌봄 제공자를 돌봐야 하는 윤리적인 의무가 조달자(provider)에게 부과됩니다. 주로 조달자는 돌봄관계 밖에 있는 제3자입니다. 조달자의 윤리적 의무는 취약한 돌봄 제공자에게 자원을 조달하는 의무이지만, 보다 넓게는 돌봄 제공자를 돌봄으로써 돌봄관계 전체를 돌보는 사회적 의무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복지의존자’라는 낙인
더 나은 복지국가는 의존자의 돌봄필요 뿐만 아니라 돌봄 제공자의 돌봄필요를 채워주는 의무로서의 복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복지를 위해서는 돌봄 제공자의 돌봄필요가 사회경제적으로 보상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제공하는 돌봄에 대한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제도와 구조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의존의 시기를 겪었으며 돌봄을 받았고, 따라서 우리 모두가 돌봄필요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 이상,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국가가 제공하는 돌봄(복지)으로부터의 수혜자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복지국가는 돌봄 제공자의 의존을 간과하거나 심지어 멸시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복지의존’이 담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입니다. 1990년대부터 미국과 서구 유럽에서 진행된 복지개혁은 노동중심 복지, 일을 위한 복지, 노동연계 복지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개인 책임의 논리 속에서 사회복지의 민영화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복지수혜자는 ‘복지의존자’로 낙인찍혔습니다. 복지수혜를 받는, 주로 배우자 없이 자녀를 양육하는 싱글맘들에게 “복지엄마”(welfare mom) 혹은 “복지여왕”(welfare queen)이라는 조롱조의 딱지가 붙었습니다. 이들은 일하지 않고 단지 납세자의 세금을 축내는 국가의 부담으로 이해될 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게으르고 생산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이고 병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묘사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개인적인 부도덕과 부정의로 인해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인식되곤 하였습니다. 2)

그림 1. 복지여왕이라는 사회적 담론을 비판적으로 다룬 언론인 주치노(David Zucchino)의 Myth of the Welfare Queen (1999)


   의존을 부인하고 낙인찍고 배척하는 기존 복지국가 정책과 담론은 어쩌면 위선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선이 가능하게 된 것은 복지국가가 ‘비의존’이라는 도덕적 인간상의 왜곡된 ‘신화’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의존의 신화’는 자율적이며 자립하고 생산하고 노동하는 인간을 도덕적 인간의 전형으로 여깁니다. 이는 의존이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사실이라는 점을 부인합니다. 의존은 자기 절제의 부족, 미약함, 게으름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비의존의 신화’ 아래에서 정부 지원(복지수혜)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존성을 증명하는 결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비의존의 신화’가 오히려 인간의 의존성, 인간의 돌봄필요, 그리고 소위 자유롭고 도덕적인 인간을 위해 누군가는 돌봄을 제공 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억압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인 돌봄관계는 인간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의존을 안 할 수 없는 인간은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의존인을 돌봐야 하는 의무도 특정 개인이나 특정 성(sex)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적 의무입니다. 돌봄관계 없이는 어떤 개인도, 어떤 사회도 존속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돌봄관계 없이는 시장적 관계도, 정치적 관계도, 관료제적 관계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돌봄관계야말로 사회의 어떤 제도와 관계보다 근본이 되며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돌봄관계 속에서 인간됨(personhood)의 의미는 재고될 수 있습니다. 3)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돌봄관계입니다. 타인과의 돌봄관계 없이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말을 할 수 없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없고, 시장에서 원하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도 인간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빛 하나로 손끝의 움직임으로 돌봄관계 속에 있는 한, 장애인도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심한 장애를 지녀 근육 하나도 쓸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엄마의 목소리 혹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미미한 느낌을 받으며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는 돌봄관계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됨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됨의 의미를 비의존적이고 자율적이며 생산적인 가치에서 찾는 입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시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공동체에서 원하고 기대하는 시민 상(象)은 시장이 요구하는 합리적이고 자기 이해에 충실한 상인(商人)이 아니라, 타인의 돌봄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돌봄 의무를 외면하지 않는 돌봄인(人)이어야 합니다.
왜곡과 착취
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하며 비의존적(independent)이고 생산적인(productive) 개인들의 결사체로 상정한다면 이러한 돌봄관계는 논의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이는 이제껏 누군가에 의해 돌봄이 제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현재의 사회가 존속되고 있다는 바로 그 자체가 누군가는 돌봄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누군가는 돌봄의 윤리적 의무를 담당해 왔으며, 그래서 돌봄관계는 지속되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비의존적이고 생산적인 개인을 상정하면서 누군가가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돌봄을 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면,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왜곡하는 것이기에, 이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장제도의 신성성과 정부의 정당성이라는 미명 아래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누군가의 희생에 안주하며, 누군가의 희생을 착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 2. 가정에서 여성이 제공하는 돌봄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착취하는 시장제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경제학자 폴브레(Nancy Folbre)의 The Invisible Heart (2002)


   가족은 돌봄관계와 상당히 부합해 보이기도 합니다. 소위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생계 부양자인 아버지와 양육자인 어머니,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어머니는 돌봄 제공자로서 자녀들을 돌보고, 아버지는 조달자로서 어머니에게 사회경제적인 지원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의 모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돌봄 제공자인 어머니의 파생된 의존성과 이에 따른 돌봄필요를 정당하게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 내에서 어머니는 조달자인 아버지에 사회경제적으로 기대고 있으며, 아버지와의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학대와 폭력에 취약하게 됩니다. 또한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갖고 수입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즉 사회경제구조상 자율적이고 비의존적이며 생산적인 개인으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정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어머니의 위상은 매우 초라해지게 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제공자는 주로 여성의 몫으로 전담되며, 여성의 의존성은 작금의 사회경제구조 아래에서 빈곤, 폭력, 배제, 학대에 취약한 조건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가부장적 복지국가
기존의 복지국가는 가부장적 복지국가의 모습입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를 복지 원리의 기준으로 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에 근거합니다. 즉, 돌봄의 책임을 담당하지 않는 따라서 시장에서 일하는 주로 남성 노동자를 복지국가는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적 영역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주로 여성의 돌봄은 간과되었으며, 여성의 열악하고 취약한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고려는 누락되었습니다.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의 입장으로는 의존인과의 돌봄관계에 있는 여성(돌봄 제공자)의 열악하고 취약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복지국가를 비판하며 대안으로 ‘보편적돌봄 제공자 모델’을 제시합니다. 4)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에 기초한 복지국가는 남녀 모두 동시에 돌봄 제공자이자 임금 노동자로서 전제합니다. 이는 모든 시민이 돌봄 제공자와 임금 노동자 모두를 수행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 감소와 돌봄을 위한 보편적 서비스 같은 제도적 기반을 조성하는 국가입니다. 또한 돌봄 제공자와 임금 노동자 간의 성별화된 역할 구분을 전제하는 사회구조를 전적으로 해체하고, 남녀가 모두 돌봄 제공자와 임금 노동자를 불이익 없이 병행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적극적인 공적 돌봄서비스 제공, 돌봄 비용에 대한 공적 보상, 임금노동과 같은 수준의 돌봄노동보상, 양성 모두에게 유리한 노동시장 등을 제공하는 국가입니다.
돌봄의 공공윤리(a public ethic of care)
돌봄을 제공하는 윤리적 의무는 사적 영역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돌봄의 공공윤리입니다. 돌봄의 공공윤리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커테이(Eva Kittay)가 제시한 둘리아(doulia)입니다. 5) 커테이는 산모가 아이를 돌볼 때, 산모를 돌보는 의무를 칭하는 개념으로 둘리아를 설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산모는 아이를 돌보았으며, 둘라(doula)라고 불리는 산모 도우미는 아이를 돌보는 산모를 돌보았습니다. 이때 둘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라는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산모를 돌봄으로써 산모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그래서 아이가 산모로부터 좋은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돌봄이 필요했듯이,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도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돌봄의 공공윤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어느 엄마의 아이(some mother’s child)인 이상,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모두가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돌봄을 줄 수 있는 조건을 만들 공적 윤리의 의무가 있습니다.
   돌봄의 공공윤리는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계약 관계인 쌍무적 호혜성(reciprocity)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쌍무적 호혜성은 상호 주고받는 관계 속 에서 권리와 의무가 생성된다고 상정합니다. 예컨대, 내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로부터 돌봄을 받고, 후에 어머니가 노인이 되고 성인이 된 내가 돌봄을 제공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봄관계에서 호혜성은 반드시 쌍무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돌봄을 주기도 하며, 누구는 평생 돌봄을 받는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쌍무적 호혜성 개념으로는 조달자(제3자)의 돌봄 의무를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돌봄의 공공윤리에서 요구하는 것은 양자관계를 넘어서는 둘리아 방식의 호혜성 개념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돌봄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돌봄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돌봄필요를 제공하고 돌봄관계를 보살펴야 하는 공적 의무가 도출된다는 의미의 윤리입니다. 이는 역시 돌봄이 개인과 사회에 필수적인 가치이며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공적 의무와 책임이라는 점입니다.
돌봄국가의 복지
결국 돌봄국가의 복지란 사회 전체가 담당하는 집합적인 책임이라는 논리에 기초합니다. 돌봄관계가 개인적 수준에서 적용되거나 혹은 시장에 의해 운영되더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국가가 제도적인 조건을 통해 돌봄의 가치와 돌봄관계를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렇다면 돌봄국가의 복지는 어떤 제도적 조건을 보장해야 할까요? 기존의 복지국가는 실업, 재해 및 퇴직 같은 노동 관련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노동자와 그의 가족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컨대, 실업보험, 산재보험, 퇴직연금등이 복지국가의 주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물론 대다수 복지국가에서 복지의 대상이 확대되었고, 사회수당이나 사회적 서비스 같은 다양한 공적지원 제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돌봄정책 특히, 아이, 노인, 장애인에 대한 돌봄정책은 여전히 미흡한 수준입니다. 많은 복지정책들이 돌봄을 단지 가족과 여성의 일로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돌봄국가의 복지는 돌봄 이슈에 보다 적극적이고 민감하게 대응 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대표되는 ‘돌봄위기’에 선제적이고 심층적으로 대응하기 어렵지만, 인간의 의존성, 돌봄필요, 돌봄의무, 돌봄관계를 전제하는 돌봄국가는 이러한 ‘돌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돌봄국가 복지의 장점은 단지 돌봄 이슈를 포함하도록 복지의 외연을 확대한다는 점을 넘어섭니다. 궁극적으로 돌봄국가의 복지란 돌봄 인프라의 구축입니다. 즉, 엄격한 공사 구분에 기초한 현행 복지정책을 재정립하고,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인 좋은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돌봄국가의 복지는 돌봄에 대한 가치를 재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돌봄은 사회적 가치가 공적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원하면 재능에 따라 돌봄을 제공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누구나 돌봄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제도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국가는 이러한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궁극적인 책임을 갖습니다. 돌봄 제공자가 시장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사회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온전히 돌봄을 담당할 수 있도록 국가의 사회경제적 지원은 필수적입니다. 시장에서 제공되는 유급 돌봄도 사회경제적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돌봄 노동권과 공정한 노동 조건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모든 남녀 노동자는 가정에서 돌봄 제공을 병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모든 노동자는 유급의 육아휴직(돌봄휴직)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야 하며, 돌봄 제공을 위해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하거나 단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돌봄국가의 시작은 조달자의 역할을 국가가 성실히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국가가 직접 돌봄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는 가정이든, 시장이든, 무급이든, 유급이든, 돌봄 제공자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지지 않고 좋은 돌봄을 제공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돌봄의 질을 보장하여 의존인이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조력하고 담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돌봄국가의 의무이자 역할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돌봄국가
돌봄은 취약하고 유한한 인간을 직면하게 하며, 서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상기시켜 줍니다. 돌봄은 아무리 좋은 복지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바를 제공합니다. 최근 감염병으로 인간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어쩌면 이는 본래적인 것이며 철옹성과 같은 시장과 복지의 외피 속에 숨겨져 왔던 혹은 숨기고 싶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시장과 복지는 감염병 바이러스로 인해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버렸고, 서로를 돌보는 돌봄에 의존하는 우리의 취약성이 한순간에 드러나 버렸습니다.
   소설가 김훈은 최근 신문 기고에서, 감염병에 대처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일회용 진단키트로 국민 하나하나의 생명을 챙기고 돌보며, 우리 모두 잠재적 보균자임을 상기하여 책임감 있게 마스크를 쓰고, 동료 시민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모습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에 의미 있는 방향성”을 보여주는데, “그 방향은 복잡하고 심오한 사회경제적 이론이나 혁명적 슬로건 속에 있지 않고, 매우 단순하고 기초적인 상식 속에 있다. 사람을 살려라!”라고 언급합니다. 6)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돌봄국가는 김훈의 통찰(通察)을 반영합니다. 돌봄국가는 복잡한 연금공식이나 추상적인 권리담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노인, 환자와 장애인이 우리의 부모이자 형제이자 친구이자 자식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삶은 소중하며, 모든 인간은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이고, 누군가의 돌봄에 힘입어 우리 모두는 삶을 이어가고 유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돌봄의 태도와 의무를 기르는 것이, 시장과 복지 이전에 선행되고 전제되어야 하며 그렇게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차
다양성의 물리학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돌봄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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