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에 숨은
가장 일상적인 차별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다양한 차별이 존재한다. 성차별, 장애인 차별, 학력 차별, 외모 차별, 인종 차별, 연령 차별, 외국인 차별, 지역 차별 등등 다양한 차별들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차별 중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널리 퍼져 있지만 가장 무감각한 차별은 무엇일까?
   이 차별은 누구나 경험하는 차별이지만 너무나도 당연시되는 바람에 차별이라는 의식을 갖기가 어렵다. 매일매일의 언어 사용으로 인해 차별이 강화되는 특징이 있고, 매일매일의 사용이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만든다. 게다가 차별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무서운 차별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나 더 큰 기득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사라지기가 정말 어려운 차별이다. 그래서 더욱 주목해야 하는 차별이기도 하다.
   바로 ‘연령 차별’이다.
   필자가 이 연령 차별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차별이 바로 한국어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연령 차별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굳어지고 일상화되는 속성을 가진 차별이라서 문제의식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문제의식을 갖고 매 순간 자각하지 않는다면 한국어 사용자들은 누구나 쉽게 연령 차별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어떤 사람은 필자의 이러한 생각이 너무나 지나치고 과격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 윗사람이고 높은 사람이고 손윗사람일 이유도, 나이가 적은 사람이 아랫사람이고 낮은 사람이고 손아랫사람일 이유도 없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사람에는 위아래나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으며, 그래서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야 하며,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배우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는 우리를 의도하지 않은 소위 ‘선량한’ 연령 차별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언어를 통해 연령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언어 사용을 통해 연령차별 의식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 ‘나이’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몇 가지 장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연령에 대한 생각을 톺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언어를 통해 어떻게 강화되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특히 언어 속에 드러나는 연령 차별과 연령 권력이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연령 권력에 의해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아울러 연령 차별이 말에 의해 얼마나 공고히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그럼 우선 나이와 관련된 다섯 가지 풍경을 먼저 만나 보자.
풍경 1.
‘나이’, 왜 이름만큼 중요한가?
몇 년 전의 일이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님과 함께 한·영, 영·한 번역 워크숍을 기획하여 교육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번역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선발해서 번역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한 후에 옥스퍼드를 방문하여 옥스퍼드 대학 학생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는 과제였다.
   두 학교의 학생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먼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한 학생이, 자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자신은 몇 살인데 함께 온 고려대학교 학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는 내용으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학생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갑자기 너무나 익숙했던 장면이 너무나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학생만이 아니었다. 앞서 자기를 소개한 학생들도 모두 자신의 나이나 학년을 말했던 것 같았다. 이 학생의 자기소개가 더 귀에 들어온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나이와 함께 자신이 ‘막내’임을 강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소가 옥스퍼드가 아니라 서울이었다면, 또 하는 말이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였다면 그런 자기소개가 그리 낯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옥스퍼드에서 영어로 듣게 되니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들렸다. 그런 생각으로 잘 들어 보니 다음 학생들의 이야기에도 빠지지 않고 나이가 등장했다. 직접 몇 살이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고 몇 학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 학생들의 자기소개는 달랐다. 자신의 이름을 말한 후에는 자신의 모국어가 무엇인지, 자신이 몇 개 언어를 말하는지, 자신의 전공이 무엇인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의 나이를 말하거나 자신의 학년을 말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냥 익숙하게 지나쳤던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서 ‘왜 우리 학생들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나이를 꼭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영국에서 유학하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영국에서 만났던 영국 사람들과는 나이 이야기를 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조차도 나이가 정확한 숫자로 떠오르지 않았을뿐더러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같은지에 대해서도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반면에 영국에서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달랐다. 그 사람들의 나이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같은지 정도는 기억이 났다. 특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왜 우리는 나이를 이름만큼이나 자기소개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풍경 2.
나이가 궁금한 우리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겪게 되는 가장 이상하고 불편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초면에 자꾸 나이를 묻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처음 만나서 나이를 묻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이상하다고, 혹은 정말 무례하다고 불평을 한다.
   나이를 묻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인지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가 어린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관찰하는 것이다. 두 아이가 처음 만나면 둘은 서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자신이 몇 살인가를 말한다. 만약 상대가 나이를 말해 주지 않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 그럼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아주 순순히 자연스럽게 나이를 말한다.
   이렇게 아이 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묻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 만나서 이름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잘 관찰해 보면 처음 만난 모든 사람의 나이를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만나서 어떤 사람에게는 나이를 묻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또, 나이를 묻는 것이 무조건 용인되는 것도 아니다. 나이를 묻는 것이 무례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자기 또래의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 ‘몇 살이야?’ 혹은 ‘몇 학년이야?’ 하고 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처음 만난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의 나이를 탐색한다. 몇 살이냐고 직접 묻기보다는 돌려서 묻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나이를 직간접적으로 알아보려는 상대의 질문을 특별히 이상하다거나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10살짜리 어린아이가 30대 정도 되는 어른을 처음 만나서 “몇 살 이예요?”라고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그 아이의 질문에 그 어른은 매우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혹은 아이의 엉뚱한 질문에 웃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물론, 어른이 아이에게는 초면에 나이를 묻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기는 하다. 30대가 50대와 만난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에는 둘 중 누구든 초면에 대뜸 상대에게 “몇 살이세요?”라고 묻는 것은 예의 바른 태도라고 하기 어렵다.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더욱 공손하지 못하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만났을 때 나이 차이가 뚜렷하게 확인되거나 만나기 전에 서로의 관계가 설정된 경우라면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가 되거나 실없는 질문이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실없는 질문으로 말을 시작하기는 한다. 한편,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또래의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경우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그리 무례한 행동이라거나 공손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상대의 나이가 궁금해지는 것일까? 왜 우리는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나이를 상대방에게 제공해 주어야 하는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들만큼 나이에 관심이 많고 민감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풍경 3.
세는나이, 만 나이, 연 나이: 나, 몇 살이지?
우리는 나이에 민감할 뿐 아니라 나이의 종류도 세 가지나 존재하는 독특한 나라에 살고 있다. 이 분야에 다양성 지표를 만든다면 아마 세계 1위가 될 것 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세 종류의 나이는 세는나이, 만 나이, 연 나이다.
   세는나이는 태어난 순간 한 살이 되고 그 이듬해부터 1월 1일이 될 때마다 한 살씩 증가하는 방식으로 계산되는 나이다. 만 나이는 태어난 때로부터 1년이 경과할 때마다 한 살씩 나이가 계산된다. 한편, 연 나이란 세는나이와 거의 유사하지만 태어난 해에는 나이가 없고 태어난 이듬해 1월 1일부터 한 살이 된 후 매년 1월 1일마다 한 살씩 증가하는 방식으로 계산되는 나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2월 31일에 태어났다면 12월 31일 그 사람의 나이는 세는나이로는 1세, 만 나이로는 0세, 연 나이로도 0세가 된다. 하지만 다음 날인 이듬해 1월 1일이 되면 그 사람의 나이는 세는 방법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세는나이로는 2세, 만 나이로는 0세, 연 나이로는 1세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나이는 세는나이다. 보통 ‘저는 몇 살입니다’라고 말할 때 기준이 되는 나이가 바로 세는나이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으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다. 보통 나이를 말할 때 세는나이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그냥 나이라고 하면 대체로 한국 사람들은 ‘세는나이’를 생각한다.
   세는나이는 한자 문화권을 공유하던 사회가 공통적으로 과거에 나이를 세던 방법이었다. 중국은 물론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을 공유했던 나라들은 대체로 음력을 기준으로 세는나이를 계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자 문화권에 속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근현대로 들어오면서 양력을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세는나이를 없애고 만 나이를 나이 세는 방식으로 삼았다.
   덕분에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세는나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국어 사용자들이 유일하다고 한다. 북한의 경우는 확인이 어렵지만, 새터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적으로는 만 나이를 사용하지만 사적으로는 세는나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우리도 법적인 표준 나이는 만 나이뿐이다. 즉, 법적으로는 만 나이가 나이의 기준이 되므로 법률에 연령이 규정되어 있는 것은 모두 만 나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만 나이는 나이를 먹는 시점이 각자의 생일이다 보니 사람마다 나이를 먹는 시점이 다르다. 그래서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연 나이다. 연 나이는 태어난 해만 알면 쉽게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부 법들이 사람마다 달라지는 만 나이 대신 편의를 위해 나이를 계산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청소년보호법이 개정된 2001년, 처음 도입된 연 나이는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을 같은 나이로 본다는 점에서 세는나이와 같지만, 태어난 해를 0세로 본다는 점에서 세는나이와 다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만 나이를 기준으로 나이를 센다. 심지어 한자 문화권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조차도 과거에는 세는나이를 사용했지만 현재는 만 나이로 나이를 센다. 한자 문화권이었던 일본, 몽골, 만주, 베트남 등도 모두 과거에는 세는나이로 나이를 셌지만 현재는 만 나이로 나이를 세는 방법이 바뀌었다.
   그런데 왜 우리만 유독 세는나이가 통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법적 표준이 만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세는나이는 아직도 전혀 흔들림 없이 건재한 것일까?
풍경 4.
빠른 XX년생의 탄생
처음 방송에서 이 표현을 듣고 무척 신기했다. 한 아이돌 그룹에 속한 20대 정도 되는 연예인이 자신이 겪었던 연예계 일화를 전하면서 이 표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아이돌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자신은 학교를 일찍 들어간 바람에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들보다 실제로는 한 살이 어리다. 그런데 연습생 시절, 연습생 중 한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왜 나이를 속이느냐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자신은 나이를 속인 적도 없고 심지어 그 연습생에게 자신의 나이를 말한 적도 없었기에 너무나 황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연습생이 화를 낸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아이돌이 속해 있던 소속사에 아이돌의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연습생은 아이돌과 아이돌의 친구가 서로 반말을 하는 것을 보고 아이돌의 친구가 자신보다 한 살 많으니 당연히 그 아이돌도 자신보다 한 살 많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돌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이돌의 나이가 그 연습생의 나이와 동갑이었다. 한 살 위인 줄 알고 지금까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 것이 분하고 억울하다며 왜 진작 빠른 년생임을 밝히지 않았냐고 그 연습생이 자신에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 아이돌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 자신이 ‘빠른’임을 먼저 밝힌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던 연예인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은 속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그냥 1월(혹은 2월)에 태어난 덕에 다른 사람들보다 한 해 먼저 입학을 한 것뿐인데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넘겨짚어 생각하고는 화를 내니 어이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초중등 학교에서 학년이 같은 학생들은 서로의 나이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같은 학년이면 당연히 같은 나이라고 생각하고 친구니까 말을 놓고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낸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온 후에 벌어진다. 물론 앞의 경험담을 얘기했던 아이돌의 경우는 이미 사회생활을 한 덕분에 보통 사람이 경험하는 것보다 먼저 ‘빠른’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검색 엔진이 가르쳐 준 이 표현의 첫 사용은 2002년 10월이었다. 한 인터넷 사용자가, 왜 1, 2월생은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는지를 물으면서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빠른 몇 년생’이란 학교를 제 나이보다 한 살 일찍, 즉 세는나이로 일곱 살에 들어간, 특히 20대나 30대 연령의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를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2002년 출생자들을 마지막으로 빠른 년생은 사라졌다. 2008년 3월 1일 초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2009학년도 입학 대상자인 2003년 출생자부터는 조기 입학이 아니라면 1월생과 2월생의 ‘빠른’ 입학이 허용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이전에 태어난 1월생과 2월생 중에는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이 삶에서 꼭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과 함께 학교에 다닌 학교 친구들보다 자신이 실제로는 한 살 어리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앞선 아이돌과 같이 나이를 속이기 위해 말하지 않았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말이다.
   그래서 빠른 년생들은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보다 한 살이 어린데 그 친구들에게 반말을 해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빠른 년생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가 한 살이 더 많은 척해서 대우를 받기 위해 일부러 밝히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어찌 보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방패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몇 달 차이도 나지 않는 사이인데도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나이에 집착하는 것일까?
풍경 5.
나이를 묻는 어른, 아이가 먼저 반말을?
2019년 10월 20일 MBC에서 방송된 예능 ‘같이 펀딩’의 ‘바다같이’ 편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고정관념을 잘 드러내 준다. ‘같이 펀딩’은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시청자의 펀딩을 통해 같이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이었다. ‘바다같이’ 편은 해양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일회용 비닐봉투를 대신할 에코백을 만드는 것이 아이디어였다. 펀딩의 취지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을 에코백에 담기 위해 세 명의 연예인 진행자들이 제주도에 있는 한 작가의 갤러리로 작가를 만나러 간다.
   진행자들이 갤러리에서 작가를 기다리는 사이에 어른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들어온다. 그 사람들을 보고 갤러리의 직원이 작가님이 오신다고 이야기를 하자, 세 진행자는 자연스럽게 어른이 작가일 거라고 생각하고 어른에게 ‘작가님’이라고 부르며 인사를 한다. 그러자 그 어른은 자신이 아니라 아이가 작가라고 소개한다. 연예인 진행자들은 모두 당황했고 어린 작가에게 인사를 한다.
   그때 작가의 동생이 나타나 성인 진행자들에게 반말로 인사를 하며 말을 건다. 어른들은 동생의 반말을 듣고 당황한다. 이어서 작가에게 몇 살인지를 묻는다. 작가는 자신이 열두 살임을 밝힌다. 진행자들은 열두 살의 나이에 대단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감탄한다.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동생에게도 나이를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진행자들은 동생이 여자 같은데 이름이 남자 이름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동생은 자신은 남자라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도 남자라고 말한다. 진행자들은 두 아이가 남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또 놀라고 당황한다. 진행자들이 두 아이가 여자라고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둘 모두 긴 머리를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행자들은 남자아이가 왜 머리를 기르는지를 물었고 아이들은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머리카락을 기부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 편은 진행자들을 통해 우리가 지닌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언어 습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는 어른이다, 어른은 아이를 만나면 나이를 묻는다, 아이는 어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 아이들이 먼저 반말을 하면 안 된다, 남자는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 등이 그것이다. 이 편이 방송된 후 시청자들은, ‘아이는 어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조언을 하거나 가르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버릇없는 일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고 이 역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잘 드러내 주었다.
   이 방송에서도 보듯이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를 처음 만나면 거의 대부분 나이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심지어 이름을 묻기도 전에 몇 살인지부터 묻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그리고 아이를 만나면 거의 대부분 다짜고짜 반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어른을 처음 만나서 가장 먼저 나이가 몇 살인지를 묻는다면, 그리고 초면의 어른에게 바로 반말을 한다면 어른들은 당황하며 불쾌해할 것이다.
   왜 초면에 다짜고짜 아이들의 나이와 이름을 묻고 반말을 하는 어른은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초면에 어른에게 반말을 하면 버릇없고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언어에 박힌 연령 차별의 그늘
익숙하지만 낯설게 바라보면서 던진 질문들은 사실은 모두 언어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나이에 유독 민감하고 다른 사람들의 나이에 관심이 많고, 전 세계에 유일하게 세는나이를 지키고 있으며,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까지 존재할 정도로 특정한 경계가 되는 1~2개월의 작은 차이에 유독 민감하며, 나이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비대칭적인 언어 권력의 문제가, 사실은 모두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굳어지며 일상화된 결과다.
   그럼 이제 언어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연령 차별의 작동 원리로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어 사용자들을 소위 ‘선량한’ 연령 차별주의자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이 바로 한국어에 발달되어 있는 ‘높임법’의 존재다. 한국어 높임법은 언어의 서열을 통해 사람의 서열을 가르치고 고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적절한 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말의 서열을 결정짓는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한다.
   그럼 이제 한국어에 존재하는 높임법의 작동 방식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어 높임법의 작동 원리
한국어 높임법은 매우 정교하다. 한국어 높임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주체 높임법, 객체 높임법, 상대 높임법이 그것이다.
   주체 높임법이란 문장의 주어에 해당하는 인물과 나와의 관계를 따지는 것으로, 문장의 주어가 나보다 높은 사람이면 주격 조사를 ‘이/가’ 대신에 ‘께서’로 써야 하고, 서술어에 ‘-시-’를 붙여야 한다. 일부 서술어의 경우는 서술어 자체를 바꾸어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사과를 먹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선생님께서 사과를 드시고 계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객체 높임법이란 문장의 객체인 목적어나 부사어에 등장하는 인물과 나와의 관계를 따지는 것으로, 문장의 목적어나 부사어가 나보다 높은 사람이면 객체 존대를 표시하기 위해 ‘에게’를 ‘께’로 바꾸어야 하고 서술어 중 일부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어 사용자들은 ‘선생님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선생님께 선물을 드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상대 높임법이란 대화 상대자와 나와의 관계를 따지는 것으로, 상대를 부르는 말과 종결 어미로 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어를 들으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를 바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야, 이리로 와’라고 하는지, ‘부장님, 이리로 오세요’라고 하는지, 말만 듣고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야’라고 부르고 ‘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와 같거나 아랫사람 혹은 낮은 사람임을 알 수 있고, ‘부장님’으로 부르고 ‘오세요’라고 한 것으로 보아 나보다 윗사람 혹은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상대 높임법은 상대를 부르는 말(호칭어)과 말의 끝맺음 표현(종결 표현)으로 표시된다.
   한국어 높임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상대 높임법이다. 주체 높임법이나 객체 높임법의 대상이 되는, 문장의 주어나 목적어에 등장하는 인물은 내 눈앞에 존재하는 인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 높임법의 대상이 되는 대화 상대자는 바로 내 앞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말을 끝내기 위해서는 종결 표현이 필요한데, 종결 표현에는 상대 높임법이 실현되기 때문에 종결 표현은 말을 하는 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말을 하면서 어정쩡하게 계속 말끝을 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상대 높임법이란 대화 상대자와 나와의 관계를 내 입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상대 높임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대화 상대자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적절한 높임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상대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 그렇다면 상대와 나와의 관계를 말로 설정할 때 고려 해야 할 점들은 무엇인가?
   상대 높임법을 적절하게 실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바로 연령, 즉 나이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존댓말을 써야 하고, 상대가 나와 나이가 같거나 적으면 반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이 한국어 사용자들의 약속이다. 물론 나이만이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 외에도 화자와 청자의 지위 차이나 친밀도는 물론 발화 장면(격식적인 장면인지 비격식적인 장면인지) 등도 중요한 요소로서 나이와 상호작용을 하며 적절한 상대 높임법의 선택에 기여한다.
나이가 궁금하고 나이에 민감해지는 이유
결국, 한국 사람들이 상대의 나이를 궁금해하고 나이에 민감한 진짜 이유는 바로 나이 정보가 적절한 말을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정보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부르는 말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또 꼭 필요한 종결 표현을 적절하게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나이는 매우 중요한 정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상대의 나이를 궁금해하고 나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한 절박함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비슷한 또래의 한국 아이들이 처음 만나서 서로 나이를 묻거나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한 첫 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다.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하는데 적절한 말을 하기 위해서 나이 정보는 필수적이다. 아이들의 경우 상대의 나이 정보는 상대의 이름 정보보다도 훨씬 절박하게 필요한 정보다. 나이 정보만 알아도 서로 적절히 말을 할 수 있지만, 이름 정보만 알아서는 서로 적절히 말을 할 수 없다.
   서로 말을 하려면 서로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의 경우 서로를 적절히 부르려면 상대의 나이는 필수적인 정보가 된다. 나이 정보가 없이는 서로를 적절히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말을 하기 어렵다. 나이 정보 없이 자기가 내키는 대로 상대를 불렀다가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고 옆에서 듣고 있는 어른들에게 혼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하기 위해 상대 아이의 나이를 아는 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절박하다.
세는나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이처럼 한국어로 적절한 말하기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나이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박하다. 그런데 만약 상대의 나이가 수시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상대와 말을 적절히 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만 나이는 각자의 생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먹는다. 같은 날 모든 사람이 동시에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각자 자신의 생일에 나이를 먹게 되기 때문에, 나만 나이를 먹을 수도 있고 상대만 나이를 먹을 수도 있다. 따라서 생일이 다른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은, 어떤 날은 둘이 나이가 같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다를 수도 있다. 또한, 서로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만난 상대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반면에 세는나이는 다르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는 기준일이 같아서 상대와 나의 나이 차이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똑같이 비례해서 상대도 나이를 먹는다. 나만 나이를 먹거나 상대만 나이를 먹는 일은 없다.
   이렇게 세는나이는 적절한 말하기를 위해 나이 정보가 절실히 필요한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매우 필요한 나이 세는 방법이다. 세는나이로 센 나이는 상대와의 나이 차이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차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곱 살 때 그런 경험을 했다. 옆집에 한 살 많은 오빠가 있었는데, 그 오빠는 늘 한 살이 많다고 나를 아기 취급했다. 오빠처럼 빨리 여덟 살이 되고 싶었던 나는 새해를 기다렸다. 그럼 오빠랑 같은 나이가 되니까 우리는 동갑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새해 첫날이 되었고 나는 바로 옆집에 가서 오빠를 불렀다. 그리고 이제 여덟 살이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빠는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아홉 살 됐는데!” 나는 그날 깨달았다. 나이의 벽은 절대 넘을 수가 없구나!
   결국, 한국어의 높임법은 한국어 사용자들이 세는나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 세는나이를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다른 모든 나라의 언어는 한국어와 같이 나이가 문법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없다. 이는, 이들 언어 사용자들이 한국어 사용자들과는 달리 나이 세던 전통적인 방식인 세는나이를 새로운 방식인 만 나이로 바꾼 것을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빠른 년생’의 탄생 배경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이 만들어진 것 또한 전적으로 한국어 문법 때문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의 선택 기준이 상대의 나이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말의 선택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학년이다.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한 학년이 같으면 실제 나이가 다르더라도 서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한다. 실제 나이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냥 동갑이라고 생각한다.
   빠른 년생들이 일명 ‘족보 파괴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들이 족보를 파괴하는 이유는 실제 나이와 학년 나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 살 일찍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사람들과 반말을 하며 ‘얘, 쟤’를 한다. 만약 학교를 같이 다니지 않았다면 둘은 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 살이 어린 사람이 한 살이 많은 사람에게 ‘얘, 쟤’를 하고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빠른 년생들은 가끔 이상한 삼각관계를 만든다. 예를 들어 두 아이가 같이 유치원을 다니다가 한 아이가 먼저 학교에 입학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유치원 친구의 오빠와 같은 반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그 아이의 유치원 친구는 오빠의 친구이며 자신의 유치원 친구인 그 아이를 만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오빠에게 ‘얘, 쟤’를 할 수도, 이름만 부를 수도 없으니 오빠의 친구에게도 그래야 하는데, 그 오빠 친구는 자신과 같이 유치원을 다녔으니 오빠라고 부르기도 어색하고 ‘얘, 쟤’라고 하거나 이름만 부르기도 매우 어색해질 것이다.
   빠른 년생들은 그래서 빠른 년생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신성한 나이 위계를 해체시켜 버리는 골치 아픈 존재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또래의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빠르고 간편하게 하기 위해 ‘빠른 몇 년생’이라는 표현을 만들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들은, ‘학교는 일찍 갔지만 나이는 한 살 어리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에 ‘빠른 몇 년생’이라는 표현을 통해 한마디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빠른 년생’이라는 표현은 나이에 의해 작동하는 한국어의 문제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뀌어 온 변화, 바꾸어 갈 변화
나이에 민감한 것도, 나이의 많고 적음을 사람의 서열로 생각하는 것도, 나이를 불가침의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도, 그래서 연령 차별이 우리에게 일상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 그 중심에 한국어의 ‘높임법’이 존재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한국어 사용자들이라면 한국어 공동체가 따르는 약속, 즉 문법에 맞게 말을 해야 하는데 문법에 맞게 말하려면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 혹은 말하는 상대자와 나와의 관계를 잘 따져서 높임법을 적절히 구사해야만 한다. 높임법을 지키지 않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문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어서 비문법적이고 따라서 올바른 한국어가 아니다.
   초면에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을 쓴 것이 문제가 된 것은 한국어의 문법, 즉 한국어 사용 공동체가 세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법에 의하면 나이 요인이 가장 중요한 높임법 선택의 기준이라서 아이는 어른에게 반말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한국어 문법은 한국어 사용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어 사용자들의 합의에 의해 그간 바뀌어 왔다. 언어는 금과 옥조도, 불가침의 성역도 아니다. 사회적 약속일뿐이다. 사용자들의 합의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언어이고, 사용자들의 합의가 없으면 절대로 바뀌지않는 것이 또 언어다. 따라서 한국어의 변화를 살펴 한국어 사용자들이 어떤 약속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를 통해 한국어 사용자들의 변화한 생각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분제를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던 시절, 신분은 높임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반말을 써야 했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이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상대보다 신분이 낮으면 나이와 무관하게 무조건 존댓말을 썼다. 또,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상대보다 신분이 높으면 나이와 무관하게 무조건 반말을 썼다. 그것이 그 당시 한국어 문법이었다.
   하지만 신분제가 없어진 후 한국어 사용자들은 그 문법을 지속적으로 바꾸어 갔다. 한국어 사용자들의 세계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신분제가 없어진 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신분제의 그늘이 존재했던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오래된 신문 기사나 당시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상의 구분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양반 신분을 가졌던 사람들은 상대의 나이에 무관하게 존댓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존댓말을 듣지 못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상대의 무례를 꾸짖었으며, 심지어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된 갑오개혁으로부터 126년이 지난 지금의 세계관에서 생각해 보면 타고난 신분에 따라 말의 높임과 낮춤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당시의 문법이었다는 것이 그저 생경할 뿐이다.
말이 각인하는 사람의 서열
이제 한국어 높임법에는 신분의 차별은 없어졌다. 하지만 이를 대신하는 연령의 차별은 건재하다. 연령이 높은 사람은 연령이 낮은 사람에게 높임말인 존댓말을 들을 것을 기대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낮춤말인 반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대한다. 반대로 연령이 낮은 사람은 연령이 높은 사람에게 낮춤말인 반말을 듣지만 자신은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높임말을 사용하면서 존대하며 공손성을 극도로 요구당한다. 만약 존대를 하지 않거나 요구하는 만큼의 공손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으면 그 말을 듣고 있는 윗사람은 불쾌해하면서 상대의 무례를 꾸짖으며 노여워한다.
   높임법이 발달되어 있는 것이 한국어의 특징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리고 높임법의 순기능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와 예의 바른 태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이는 높임법 중 ‘높임’에 방점을 찍은 해석이다. 사실은 한국어 높임법은 높임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낮춤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별적인 사고는 높임법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랫사람, 윗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혹은 ‘손아랫사람, 손윗사람’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상대 높임법의 경우도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따져서 아랫사람 혹은 낮은 사람은 윗사람 혹은 높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윗사람 혹은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 혹은 낮은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필자도 앞서 한국어의 높임법을 설명하면서 ‘아랫사람, 윗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결국, 한국어 사용자들은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윗사람, 높은 사람, 손윗사람이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아랫사람, 낮은 사람, 손아랫사람이라는 생각을 배우게 되고 매일매일의 언어 사용을 통해 그런 생각을 강화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어 사용자들은 ‘나이’에 대해 다른 언어 사용자들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감각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연령 차별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한국어의 높임법이 초래하는 공고한 연령 차별적인 생각은 언어를 배우면서 함께 습득되는 것이어서 너무나 익숙하고 일상적이다. 그래서 문제의식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존댓말과 반말의 위계는 존댓말을 사용해야만 하는 사람과 반말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 권력 관계를 만들고 불평등한 관계를 설정하게 한다. 당연히 차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의 가치를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로 배우고 가르쳐 왔다. 그리고 이 가치는 우리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데 이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어 사용자들은 매일매일의 언어 사용을 통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지금의 한국어는 이처럼 한국어 사용자들이 추구하는 이념을 담지 못하고 우리를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연령 차별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다. 그런데 그 도구가 생각을 담지 못하고 있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담지 못한다면, 언어를 바꾸어야 할까,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목차
타이포그래피와 다양성
한국어에 숨은 가장 일상적인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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